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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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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작된 과거에 대한 '어떤 기억' / 김진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이념통제 국가를 건설하려던 권력자가 국민으로부터 심판받아 유폐되었다. 그가 이끌었던 여당은 야당이 되어 현재의 정치를 독재로 규정하고, 당면한 국가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기를 거절한다. 그녀의 ‘금등지사’에 의존하는 또 다른 정치세력은 광화문광장 점거에 나섰다.

유폐된 그녀의 영향력을 빌려 권력을 얻어 보고자 하는 이들이 기대고 있는 것은 ‘어떤 기억’이다. 노년의 고단함을 무릅쓰고 태극기를 들고 광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그 기억을 대표한다. ‘훌륭했던 과거의 질서를 회복하지 않으면 또다시 굶주림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헌법, 민주주의, 인권, 평화 같은 것들은 모두 철없거나 턱없이 사치스러운 이상일 뿐, 북한과 내통하는 무능력하고 부도덕한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면 나라가 도탄에 빠지리라. 이 사회를 지켜내는 것은 오로지 엘리트가 내리는 결정과 그 결정을 지켜내는 엄정한 질서이다.’ 자신의 권력을 키우고자 하는 세력들은 이들의 기억을 더욱 가공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질서와 결단에 대한 향수’를 빚어낸다.

100년 전,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암흑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황제는 이웃나라로 도망쳤으며, 권력을 휘두르던 군부는 의회 다수당에게 권력을 이양함으로써 전쟁책임에서 도망쳤다. 패전의 책임과 혼란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국민들과 새로 들어설 정부의 몫이 되었다. 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되었고 독일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바로 나치 집권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불명예를 숙명처럼 달고 있는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은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과 극한 인플레이션을 감수해야 했고, 극단세력들의 테러와 국가전복 시도를 이겨내야 했다. 그렇다고 생존의 희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수출이 살아나고 소비와 문화도 부흥하여 ‘황금빛 20년대’라고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희망을 살리지 못했던 결정적인 책임은 정치에 있었다. 정당들은 연정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여당이 되어 책임지고 비난을 받기보다는 야당으로서 비판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었다. 비난만 받는 정부는 매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구성과 붕괴를 거듭했다.

당시 독일의 광장을 지배했던 것도 ‘어떤 기억’이다. 사람들은 그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을 ‘제국의 시민들’이라 부른다. 정당들이 무책임한 비협조와 비난으로 일관할 수 있던 건 그들의 행태에 환호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천박한 것으로 여기고, 귀족 엘리트가 지배한 제국의 시절을 그리워했다. 조국의 모든 불행은 민주주의와 정부의 무능력 탓이라 한탄했다. 학자, 언론인, 고위공무원, 법관들이 민주주의 전복을 위한 결사를 결성했다.

나치의 등장에 환호하고, 새로 도발한 제2차 세계대전을 또다시 패전으로 마감하고서야 독일인들은 각성하였다. 순수한 애국심, 과거에의 향수가 몇몇 조작자들에 의해 씻지 못할 역사의 중죄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얻은 교훈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민주주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자가 필요하다.’

성공적인 독일 정치의 중심엔 인정, 지역감정, 지역개발 논리 같은 것에 끌리지 않고 냉정하게 심판하는 유권자들이 있다. 조작된 과거 기억에 흔들리는 제국의 시민들이 설 자리는 없다. 그렇다 보니 여·야, 보수·진보를 불문한 모든 정당들은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집중한다. 이념 비난, 인신공격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손해를 보더라도 타협하고 함께 책임지는 정치를 하는 정당들을 볼 때,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자’란 이런 것을 의미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애국심을 내세우며 상대편에는 애국심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세력, 책임을 거부하고 비난만 능사로 삼는 세력이야말로 백성의 미래를 파괴하는 비겁한 선동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자가 되는 첫걸음일 것이다.

김진한 / 헌법전문가·독일 에어랑엔대 방문학자


ㅡ 경향신문 2019년 7월 13일자 22면 <시선>에서 전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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