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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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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 시인의 시집에 부쳐
시지프스의 운명을 위하여
-장영 시인의 시집에 부쳐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시인 장영이 시집을 낸다고 한다. 지난 세기를 마감하기 직전 그는 한 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었는데, 정작 주변에서는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듣자 하니 이번 시집은 그의 첫 시집에서 몇 편을 빼고 약간의 미발표작을 추가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은 아마도 첫 시집의 개정판 정도가 되는 듯하다.
  지속적으로 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는 오늘 장영의 시집 소식을 듣고 시를 쓴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문(自問)해 본다. 지난 시기 시는 시가 삶과 현실에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비판에 줄곧 시달려 왔다. 이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가능한 질문이며, 과거에도 그랬듯 시를 쓰는 이들은 이에 대해 속시원한 답변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 질문은 우리가 맞닥뜨린 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그 대안의 도출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 아니며, 좀 더 근본적으로는 21세기 문학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점검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과 맞닥뜨려 나는 김수영의 시 무용론을 떠올려 본다. 김수영은 ‘시의 뉴 프런티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시 무용론은 시인의 최고 혐오인 동시에 최고의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시인은 언제나 이 양극의 마찰 사이에 몸을 놓고 균형을 취하려고 애를 쓴다. 여기에 정치가에게 허용되지 않은 시인의 모럴과 프라이드가 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김수영의 이 말을 떠올리노라면 온몸이 오싹해진다. 양심과 혁명의 시인으로서 결코 세상과 화해할 수 없었던 존재이자 천성적 자유인이었던 김수영의 이 말은 오늘날 시인의 역할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그는, 이 인용문에 이어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라고 썼다. 김수영에 따르면, 시인에게 시란 혁명의 동어반복이었다. 따라서 시를 쓴다, 라는 문장을 ‘혁명을 한다’라는 문장 위에 겹쳐 읽어도 그 의미는 결국 동일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정말로 혁명가인 셈이다. 그러나 또 김수영은 시 무용론이야말로 시인의 최고 혐오이자 최고의 목표라 했다. 이 형용 모순을 위해서 그는 시를 썼는데, 이 점은 그의 시대가 안고 있는 비극이며, 우리 시대가 아직도 안고 있는 비극이다. 왜냐하면 시 무용론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유효한 목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삶과 시대의 불화는 여전하며, 그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 또한 여전하다. 최소한의 진지함을 갖춘 시인이라면 이 메꾸어질 수 없는 간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시 무용론이야말로 시인의 최고 혐오이자 최고의 목표라는 명제에는 시가 본질적으로 ‘타자 지향’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시가 필요없는 사회란 삶과 시대,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이 일치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 운명 공동체에서라면 삶과 현실, 개인과 사회 사이에 간극과 긴장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만약 이런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저 아득한 문화적 시원(始源) 상태로의 회귀가 될 것이며, 또 다른 호머 시대의 도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러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리 없으니 이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란 불가능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김수영에 의하면, 시인의 일 말고도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바로 연애와 정치이다. 왜 연애와 정치가 시를 쓰는 일처럼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기란 어려운 일이나 발언의 진의를 유추해 보자면, 시작(詩作)과 연애와 정치는 명백하게 ‘타자 지향’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데, 바로 이 ‘타자성(他者性)’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연애나 정치는 담백하게게 말해 자신을 타자와 일치시키는, 혹은 타자를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작업이고, 이 일치와 동화야말로 불가능한 목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애의 불가능성은 장영의 시에서, ‘내가 부재 중인 곳에서 우유 거품과 거짓말을 섞으며 커피를 마시는 애인’(연가戀歌)이나, ‘나의 이기주의를 위해 손톱만큼의 노력도 않으리라 약속하는 당신의 이기주의’(당신의 이기주의)로 나타난다. 또 때로는 ‘그녀와 나의 어긋난 발성법’(바보 노래, 그 못다부른 연가를 위하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장영의 시집에는 대체로 어긋난 관계성의 절망과 좌절을 노래한 연시(戀詩)가 많은데, 그래서 이 시들은 합일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엘레지가 된다. 그리고 이 시집에서 연애에 관한 시편들 말고도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삶과 시대의 불화를 다루고 있는 시들이다.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조선현대사 학습’ 연작이나 강퍅한 80년대를 제재로 한 시들이 그러한데, 이 시들은 압도적인 현실의 규정력에 짓눌린 개인의 이지러진 삶을 관찰자적 시선을 통해 담담하게 진술한다. 아마도 화자가 시인 자신일지도 모르는 ‘침묵에 관하여’는 현실과 항상적인 긴장 관계 속에서 독재와 야만의 시대를 견뎌야 했던 소시민의 일상과 그 내면 풍경을 잘 보여 준다.  
  현실은 불합리한 전체성이며, 이 불합리한 전체성과 대결해 시인은 자신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제거하려 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정서적 환기와 주관적 교감을 본질로 하는 시는 양자 사이의 간극을 메꾸기 위한 적극적인 발언이 된다. 이런 점에서 시란, 현실을 매개로 한 타자 지향의 소통 행위인 셈이다. 이같은 소통 행위의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목표는 시가 필요 없는 사회의 도래가 될 텐데, 이 불가능한 목표로 인해 시인은 시지프스의 운명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라 할지라도 시인은 이 운명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김수영이 말한 시인만의 모럴과 프라이드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시인들은 이 불가능의 운명 앞에 굴복해 버리고 만다. 자족적인 내면성과 주관적 서정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거나, 불가해한 형식 실험과 난수표 같은 언어들의 유희 속으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현대시는 그 내면성으로부터 깨어나 타인을 향해 언어의 문을 열어야만 한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며 간접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시의 장르적 속성상 시에서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직접적인 진술만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다른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인은 자신만의 언어로 현실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이 부딪침은 필연적으로 존재의 파열을 가져오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시인에게는 존재의 파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균열이 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된다. 이 힘은 장영의 시에서 때로는 일정한 결함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그의 초기시 일부가 그렇다. 이를테면 ‘강江에서’, ‘누이를 위하여’ 등의 시에서 나타나듯 시적 대상으로의 과몰입과 그에 따른 주정적 토로의 진술 방식, 과잉 감정의 거친 호흡 등이 그 예이다. 아마도 이는 현실의 규정력에 시인이 일방적으로 지배당한 결과이리라. 이러한 결함들이 어느 정도 가시고, 장영이 최근 일관되게 천착하고 있는 근대주의 해체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보여 주는 시가 바로 ‘당신의 이기주의’이다. 이 시에서 ‘근대주의의 표상으로서 아비’가 처음 등장하며, 아마도 시인 자신일지도 모를 화자에 의해 아비는 증오의 대상이자 거부의 대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장영의 시에서 근대주의의 해체와 그 변형으로서 아비 살해 모티프는 핵심적인 시적 기획이 된다.

  시는 현실을 향한 발언이며 존재의 치열한 추구이다. 장영의 시들은 근대라는 계몽주의적 미몽을 거부하고, 그 허구적 신화를 허물기 위해 노력한다. 워낙 과작이라 첫 시집 이후 작품들이 충분히 쌓이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려우나 모순 어법과 아이러니를 시적 특징으로 하는 그의 근작시들은 그래서 근대주의에 대한 안티 테제가 된다.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시인이 시의 존재 의의를 추궁하는 질문에 김수영식의 시 무용론을 기꺼이 수용하고 시지프스의 불가능한 임무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답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개인을 왜곡하고 파편화시키는 불합리한 현실에 맞서 시로써 그 모순을 드러내고자 하는 장영의 시적 기획이 모쪼록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이 작업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려 한다.
-박찬호(시인, 전 시인정신 편집장)


parapin
시인의 시가 많이 인용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쉽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좋은 평론이네요. 책으로 읽고 싶어 한 권 주문했습니다.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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