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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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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재중인 휴머니즘의 풍경들/박찬호시집 해설-진순애
박찬호 시집 ‘나는 네가 그리울 때만 환했다'

부재중인 휴머니즘의 풍경들
진순애 문학평론가

1.
현대는 탈휴머니즘으로 동시대성이 특화된다. 현대시의 동시대성도 탈휴머니즘의  지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역설적으로 현대가 휴머니즘이 부재하는 시대임을 반증한다.
탈휴머니즘의 동시대성은 파편성·우연성·자의성 등에 있고, 휴머니즘은 세계와의 속성·일체성·동일성·통일성 등의 지평에 놓인다. 휴머니즘이, 그리고 자아와 세계와의 동일성이 부재하는 동시대에서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일은, 그리고 그 풍경들은 비극적이다. 현대시의 서정이 비극적 서정으로 탄생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대시의 비극적 서정은 탈휴머니즘이 심화되고 확장된 21세기에 와서 낯선 서정으로 치환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비극적 서정의 중심 태도인 회상하고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풍경조차 부재하는 까닭에 그러하다. 상실돼버린 타자로서의서정이자 상실돼버린 휴머니즘이다. 비극적 서정조차 부재하는, 곧 휴머니즘을 지향하지조차 않은 탈휴머니즘이 친숙한 동시대성인 것이다.
부재중인 것의 중심에는‘내’가 있고, 부재중인 ‘나’를 그리워하는 풍경이 휴머니즘을 은유한다. 부재중인‘나’를 그리는 일이 휴머니즘을 은유하는 것은 현대가 낳은 아이러니다. 부재중인 휴머니즘이 탈휴머니즘의 동시대성을 특화하므로 그러하다. 부재중인‘나’를 향한 그리움이 인간의, 인간을 위한,휴머니즘으로서의 근원적 태도가 돼버린 것이다. 때문에 부재중인 휴머니즘을 그리는 박찬호 시의 서정적 풍경들이 비극적 서정을 넘어 낯선 서정으로써 현대의 아이러니를 역설
적으로 심화한다.
특히 부재중인 ‘나’는 박찬호의 유년을 은유하고, 현대가 상실한 고향을 은유하며, 현대의 타자가 된 자연을 은유한다.
휴머니즘이란 부재중인 ‘나’를 회상하고 추억하며 그리워할 수 있을 뿐이라는 데 서정의 비극성과 그 비극의 아이러니가 심화된다. 부재중인 ‘나’를 그리워하는 행위조차 부재하는 탈휴머니즘의 시대에 부재중인 휴머니즘을 방증하는 그리움이 낯선 서정일 수밖에 없음을 박찬호 시가 특장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부재중인‘나’도, 부재중인‘나’를 향한 그리움도 탈휴머니즘의 타자임을 특화시킨다.
휴머니즘의 길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므로 동시대의 타자이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 시인의, 그리고 예술가의 궁극적 길이므로 타자로서의 외로운 행보임을 방증한다. 여기에 박찬호 시의 휴머니즘적 풍경들이 돋보이는 의의가 무한하다.

턱없이
처녀들의 문장이 떨어진다
고개를 모로 꺾고 낯모를 설움
함부로 익혀 제 살 붉게 한다
떨어지기 위해
가지 끝에서 젖는 살
서명 없이 산화된 봄의 내력도
사소한 소문으로 빛살에 철거된다
—「목련 이후(以後)」전문

박찬호의 휴머니즘의 봄은 찬란한 슬픔의 계절이다. 생명의 계절, 소생의 계절이라는 보편적인 봄을 넘어선다. 그의 봄은 역설적이다. 역설적인 봄이라고 해서, 목련이 피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목련이 핀 봄은 여전히 찬란하다. 그러나 박찬호의 봄의 중심은 목련이 핀 찬란한 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련 이후’의 슬픈 봄에 있어서 그의 봄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역설적 지평을 확장한다. 휴머니즘의 봄이 부재중인 봄인 까닭이다.
더 이상 인간은 혹은 박찬호는 봄과 동일화할 수 없으므로,혹은 타자가 된 봄이므로 봄은 슬픈 봄이다. 이제 더 이상‘나는 너’가 될 수 없다. 현대는 휴머니즘의 세계에서 일탈했으므로,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 목련은 목련이고 봄은 봄으로 각각 존재한다.“떨어지기 위해//가지 끝에서 젖는 살”이며,“서명 없이 산화된 봄의 내력도//사소한 소문으로 빛살에 철거된다.”때문에 목련이 피는 찬란한 봄조차 슬프고 목련이 떨어진 이후는 더욱 슬프다. 생명과 소생의 환희가 슬픔으
로 치환되는 역설적 봄의 서정이 비극적 서정을 넘어 낯선 서정을 환기한다.

허름한 햇살이 길 밖으로 저문다
남은 길은 일찍 제 몸을 줄이고
도시의 바깥, 초록의 좌표를 읽었다
때때로 저무는 것들의 행방도 상처를 갖는가,
귀 기울이면
견고해라
한때 나였던 불구의 꿈
마른 가지에 흔들리던
활엽의 아득함이여
저무는 노을
한사코 끌어내려 길을 덮는
산다는 것의 사무침
—「초록의 좌표」전문

초록의 좌표는“한때 나였던 불구의 꿈//마른 가지에 흔들리던//활엽의 아득함이여//저무는 노을//한사코 끌어내려 길을 덮는//산다는 것의 사무침”으로 치환된다. 초록이“산다는 것의 사무침”을 환기하면서 부재중인 휴머니즘의 비극성이 심화된다. 그러나 초록이 더 이상 상징의 봄이 아니라 해도 초록은 여전히 봄의 소생력, 봄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보편적 기억으로 현존한다. 봄의 상징성이 기억 속에서 보편성을 환기하면서 부재중인 휴머니즘의 비극성을 배가하고 있다. 초록의 자연은‘나’와의 동일체가 아니라 타자가 돼버린지 오래라서 비극적 서정이 낯선 서정으로 치환된다.
초록의 좌표는 생명의 좌표를 상징하는 보편적 기억으로 현존할지라도,‘허름한 햇살이 길 밖으로 저물고, 남은 길은 일찍 제 몸을 줄이고, 도시의 바깥이 제자리인 초록’에서 삶의 희망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의 사무침을 읽는 역설이 도시의 서정을 낯선 서정으로 심화시킨다. 탈휴머니즘의 공간인 현대의 도시에서 부재중인 자연과의 동일시를 지향하는 일은 부재중인 휴머니즘을 찾아가는 비극적 풍경의 병치다. 근원적 세계인 자연과‘나’와의 동일성을 지향하는 풍경은 도시의 낯선 풍경인 것이다.

2.
막다른 골목을 돌아설 때면
불현듯 네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불우한 약속처럼 돌아왔다
이처럼 어설픈 아픔도 그리움이 될 수 있던가
아픔은 흉터처럼 또렷해서 상처나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자주 돌아오는 것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
봄에 피는 꽃들은 무슨 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한밤중이 지나면 소문처럼 네가 피었다
네가 그리울 때만 나는 환했다
—「목련이 필 때면」전문

“네가 그리울 때만 나는 환했다”는 언술처럼 그리움은 박찬호에게 휴머니즘의 생명력으로 작용한다.‘네가 오는 소리는 불현듯 들리고’, 혹은‘돌아온 너는 불우한 약속이거나 아픔과 같고’,‘흉터가 된 그 아픔은 상처도 동시에 기쁨’도 되는 이율배반적인 생명력이다. 그러나 ‘네가 돌아오는 것에 확신을 잃었으므로’, 탈휴머니즘의 지평이 심화된다. 그리운 ‘네’가 혹은 ‘내가 ’돌아온다는 확신조차 부재중이므로, 휴머니즘도 부재중일 수밖에 없다.
목련은 한밤중이 지나 소문처럼 피어나지만, 그것은 과거형이다. 그리운 과거에는 목련이 핀다는 것은 단지 떠돌기만 하는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러나 탈휴머니즘의 시대에서 목련이 피는 것은, 혹은 목련이 피는 때는 그리운 세계로만 살아있을 수 있다.“봄에 피는 꽃들은 무슨 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 있을 뿐이다. 환희의 소리, 생명의 소리, 소생의 소리들을 상징하는 봄의 보편적인 소리는 기억 속에서만 현존하는 까닭이다.
타자가 된 자연이므로, 타자가 된 자연을 그리는 인간의 일또한 타자로서의 소외된 풍경일 뿐이다. 그것은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소외된 타자로서의 회상이다.
타자로서 타자들을 향한 그리움인 것이다. 그리운 회상 속에서나마 세계와 동일체였던 유년의‘내’가 있고, 휴머니즘의 고향이 있다. 목련이, 봄이, 우주만물이 기억 속에서만 유년의‘ 나’와 동일체로 현존할 수 있을 뿐이다.

내 어린 시절이 홀로 사는 옛집에
너 외로이 다녀갔다지
그 집 마당에 혼자 선 석류나무도 보았다지
말없이 반쯤 벌어진 석류만 저물도록 바라보다 돌아갔다지
너 떠난 오랜 후 옛 주소로 도착한 엽서 한 장
다시 찾은 옛집 마당에
다정하게 고개 내민 석류
네가 남기고 간 젖은 안부를
사무치게 전해주었지
—「엽서」전문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내 어린 시절이 홀로 사는 옛집”은‘ 나’의 유년의 병치다. 또한 그것은‘외로이 다녀간 너로도, 옛집 마당에 혼자 선 석류나무로도, 옛 주소로 도착한 엽서 한 장으로도 ’병치된다. 동시에 그곳은 유년의 ‘나’와 우리의 고향과 동일체였던 자연친화적인 휴머니즘의 공간을 상징한다.
자연친화적인 휴머니즘은 지금, 타자가 되어 옛집에 홀로 현존한다.
그러므로 부재중인‘나’는 그리운‘ 나’의 유년이고, ‘나’의 유년이 살았던 그리운‘나’의 옛집이고, ‘나’의 옛집 마당에 홀로 서 있는 그리운 석류나무이며, 사무치게 안부를 묻는 젖은 엽서로 치환된다. 젖은 엽서에 담긴 그리운 사연이 타자가 된 ‘나’를 ‘사무치게 하는 ’휴머니즘의 풍경을 은유하고 있다. 탈휴머니즘의 시대에 엽서는 혹은 젖은 엽서는, 그리고 석류나무, 마당, 옛집, 젖은 안부, 사무침 등은 부재중인 ‘나’의 은유이자 휴머니즘의 은유인 것이다. 그것들은 회상으로만 찾아오는 휴머니즘의 풍경이다.

그리운 그곳은 “자주 돌아보던 좁은 길 위로//작은 새가 날아오르고//오래 묵혔던 비유들만//공기처럼 가벼운 가을//새들이 지우지 않고 간 노을에//바랜 풍경들이 일어선다//아 무리 생각해도 아득하던 시간들「( 구름」)”이 돼버린 과거의 시공이다. 그‘아득하던 시간’은 부재중인 시간인 까닭에‘오래 묵혔던 비유들만큼’낯설다. 회상으로조차 지향되지 않는 오래 묵힌 비유들이 낯선 서정을 환기한다.

3.
콜타르를 칠한 목조 다리를 건너면 언제나 오후를 늘인
권태를 유리창에 붙이고 졸고 있던 할아버지의 복덕방, 낙
숫물 검게 내린 담장에 재개봉 영화도 벽화처럼 걸려 있었다

다리에 덧칠된 콜타르가 벗겨질 때쯤 동네에는 며칠씩
비가 내렸고 우리가 아는 모든 남루들이 비에 젖었다
아이들은 장마 때면 다리에 서서 떠내려 오던 윗마을
세간들에 이유 없이 돌을 던졌고 세간을 맞힐 때마다 침
을 뱉었다 아이들이 맞힌 몇 개의 세간은 아이들의 팔뚝에
자줏빛 멍울을 남겨놓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절 수많은 날들이 흙탕물처
럼 흘러갔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뒤엉킨 소음들을 뱉어내
던 골목에는 더러 흉흉한 소문들이 다리 난간을 흔들어놓
곤 했다

비에 젖은 시간들은 언제나 느릿느릿 해거름의 색채들
을 풀어놓았고 붉은 하늘빛에 흥건해진 사람들은 때때로
가난을 잊기 위해 다리를 건너갔고 아이들은 누군가 흘린
시간을 찾으러 다리를 건너오기도 했었다
어둑한 등불을 발등에 차고 다리를 건너오면, 아침에
접어두었던 결의들이 불빛 사이로 흩어져갔다 다짐할 수
는 없지만 가끔 알 수 없는 풍경들이 다리를 건너오는 소
리가 들렸고 문득 유년이 사라진 것도 같았다
—「다리」전문

“콜타르를 칠한 목조 다리”는 남루했던 유년의 삶을 은유한다. 그곳에는‘졸고 있는 할아버지의 복덕방’이 있고,‘재개봉 영화가 벽화처럼 걸려 있는 검은 담장’이 있다.‘다리에 덧칠된 콜타르가 벗겨질 때쯤이면 동네에도 며칠씩 비가 내리고 남루한 삶에도 비가 내리던 ’유년의 가난이 그리운 휴머니즘을 은유한다. 남루한 유년은 외적인 풍경이었을 뿐 내적으로는 순수와 낭만과 희망과 인간이 살아있던 휴머니즘의 풍경이다.
탈휴머니즘은 외적으로는 남루했으나 휴머니즘과 동일시였던 유년의 내밀성조차도 타자화시킨다. 물질주의의 자본주의와 과학주의가 탈가난을 견인하며 탈휴머니즘의 종착역으로 질주해온 동시대적 명제로 작용한 까닭이다. 비극적인 휴머니즘의 다리를 건너온 탈휴머니즘은 “어둑한 등불을 발등에 차고 다리를 건너오면, 아침에 접어두었던 결의들이 불빛 사이로 흩어져갔다 다짐할 수는 없지만 가끔 알 수 없는 풍경들이 다리를 건너오는 소리가 들렸고 문득 유년이 사라진 것도 같”은 상실의 시대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추억하고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휴머니즘의 풍경조차 낯설게 심화시키는 동시대성이다.

앞마당은 아버지의 작은 꽃밭이었다
호박꽃 넓은 잎들이 굵은 빗줄기에
자주 목을 꺾었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삶 속으로
온종일 산동네 행 버스들이 지나다녔다
실연한 딸이 자살한 난쟁이 한의원은
어느 더운 아침 집을 허물고 이사를 갔다
부서진 벽돌 더미만 고요를 지키던 담장 위로
더위를 물들이며 여름이 지나갔다
돌아가고 싶지 않던 시간의 틈새에
깨진 사금파리처럼 박힌 기억들
내가 찬 공에 짓이겨지던 당신의 꽃밭에
뭉툭한 바람 소리처럼 스며들곤 했다
온종일 가로수 위에 쌓였던 소음을 털어내며
아이들의 밥때를 알리던 해거름엔
꽃밭에 남은 샐비어가 붉은 몸을 풀어
아이들의 투정을 달래주었다
버스를 내려 서둘러 건너온 건널목
이쯤에서 바라보던 저 생은
얼마나 눈부셨던가,
텅 빈 저 길로 이른 노을이 젖어들었다
신발 잃은 어린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빈집」전문

“아이들의 밥때를 알리던 해거름엔/꽃밭에 남은 샐비어가 붉은 몸을 풀어/아이들의 투정을 달래주었”던 휴머니즘의 유년은“신발 잃은 어린아이가 걸어가고 있”는 비극적 서정의 주체를 탄생시켰다. 가난했어도 순수했던 유년에는‘ 앞마당은 아버지의 작은 꽃밭이었고, 호박꽃 넓은 잎들이 굵은 빗줄기에 자주 목을 꺾었던’서정성이 휴머니즘과 일체였으며, 신발 잃은 어린아이는 서정적 자아의 주체였다. 비록‘온 종일 산동네 행 버스들이 지나다녔고, 실연한 딸이 자살한 난
쟁이 한의원은 어느 더운 아침 집을 허물고 이사를 가버린 빈집의 주체’였을지라도, 휴머니즘이 살아있는 풍경은 그리운 기억으로 살아있다.

“버스를 내려 서둘러 건너온 건널목/이쯤에서 바라보던 저 생은/얼마나 눈부셨던가,/텅 빈 저 길로 이른 노을이 젖어들었다/신발 잃은 어린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는 빈집의 풍경은 탈휴머니즘의 시대에 그 비극성조차 소멸되어 낯선 풍경으로 작용한다.“내가 비워진 자리에/그대 낡은 이름을 새겨/부재중인 나를 불러다오”「( 맥주는 맥주다」)라고, 몽환처럼 부재중인‘나’를 찾아가는 비극적 서정조차 낯설게 하고 있다.
유년이 살고 있는 고향의 옛집은 빈집의 풍경으로 부재중인 ‘나’를 은유하고, 부재중인 휴머니즘을 은유한다. 부재중인 ‘나’는‘비어버린 나’라는 낯선 서정으로 탈휴머니즘 시대의 휴머니즘을 은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시대를 건너온 혹은 건너갈 시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나무들도 깊이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너무 이르거나 늦게 하루를 엿본 새들이
전선을 스쳐갈 때마다 툭, 툭 색깔을 떨어트렸다
무심코 계절을 읽던 오전의 바람도
나뭇잎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삐딱하게 내리꽂힌다
이른 아침이면 언제나 제 몸을 밝히던 것은
아팠거나 불편했던 기억들,
멀리 선 감나무 몇 그루
적막한 풍경을 접으며
뿌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무의 자세」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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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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