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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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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나무 한 그루를 읽고
가을나무 한 그루
                                  이영권

가을 한 가운데에 섰다.
비 내리는 날 이른 아침
인생의 무게는 정수리부터 비워지고
마음 가장자리 길 잃은 상념들
가벼운 빗방울 하나에도 맥없이 떨어진다.
알록달록 나름대로 쌓아올려 세상을 모자이크하는
삶들 틈바구니에서 자꾸만
추억되는 것이 많아지는 나무 한 그루

찬란했던 봄도 흐르고 흘러 예까지 왔구나.
아버지 어깨가 까마귀 날개처럼 흐느낄 때
부엌에서 옷고름 훔치는 어머니를 보았지
우린 삶은 무논에 올미를 캐서
까만 껍질 속 하얀 맛으로 허기를 채우고
해 저물면 논두렁에 빠진 산그늘 밟으며
언젠가는 피어날 꿈처럼 굴뚝마다
한가로운 행복을 하늘로 피워 올렸다.

세상이 모두 내 것이었던
그 한여름
하늘로만 향하던 발돋움이나
뜨겁던 뙤약볕에 갈라진 입술이나
우레처럼 불만스럽던 젊음의 열정이나
홍수처럼 넘쳐났던 사랑도
이젠 흘러간 강물이 되었구나.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엔
하얀 비듬처럼 떨어지는 세월의 잔상들
정처 없이 떠다닐 추운 골목길
그 입구를 서성이고 있다. 그나마 아직
나를 떠나지 않은 푸른 잎들 남아있으니
움츠린 몸 다시 한 번 추슬러
가슴 가득 하늘을 안아본다.


지나고 보면 아름답다.
어릴 적 어머니아버지의 슬픈 모습과 허기를 달래려 올미를 캐는 풍경이 아련하다. 시인은 마음 둘 곳 없이 낙엽을 떨구는 가을 나무 한 그루다. 가을 나무를 보면 누구나 쓸쓸하다. 하지만 ‘인생의 무게는 정수리부터 비워진’다는 표현은 심상치 않다.
그 뒤의 ‘알록달록~~세상을 모자이크하는 삶들’의 틈바구니에서 시인은 상대적 ‘잃음’을 느낀다. 그 잃음은 젊은 날, 혹은 젊은 날의 추억으로 보인다.

곧 모든 잎을 내려놓을 가을 나무 한 그루와 자신을 동일시 할 만큼의 정서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자아낼 만큼 시에 나타난 상실감은 만만찮다. 그 상실감 속에서도 ‘나를 떠나지 않은 푸른 잎들이’ 시인을 위무하고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그 ‘푸른 잎’으로, 혹은 때문에, 살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쉬운 것은 '떠나지 않은 푸른잎' 에 비해 시인 스스로 내면에 키우는 푸른 잎의 흔적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다는 점이다. '해 저물면 논두렁에 빠진 산그늘 밟으며' 처럼 격조있는 표현은 오롯이 시인 자신의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영권
parapin님, 논평 감사드립니다.
11월의 마지막날 좋은 하루 되소서.
 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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