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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경미 
Subject  
   '시골 목욕탕' 을 읽고






언어에서 의미意味와 용법用法, 두 가지 기능을 구별한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다. "이것은 오렌지이다" 라고 했을 때, 이 말은 오렌지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것을 오렌지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의미에는 명령어가 숨어 있다. 이와 대비되는 '용법' 으로서의 언어에는 의미의 사형선고로부터 달아나라는 요정들의 다급한 외침이 있다. 그래서 고립된 섬島들을 이어주는 다리橋로서의 언어. 「북치는 소년」에서 김종삼이 말했던 '내용 없는 아름다움' 이란 언어의 바로 그러한 기능을 표현한 게 아닐까. 쉴새없이 쏟아지는 명령어의 폭격 속에서. 초록님의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잠시 글자들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느낌이다.

목욕탕이라는 공간은 근대 계몽 이성 이후 소외받은 육체body, 자신의 가장 진실한 모습nude과 대면하는 곳이다. 더구나 그곳이 '시골' 목욕탕이라면 파시즘적 문명의 속도로부터 버림받은 땅이라는 이중의 소외가 있다. 정신으로부터 육체가 하늘로부터 대지가. 그러나 이러한 소외를 특권화시키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서. 무수한 명령어들에 의해 조작되고 프로그램화된 사유와 관념의 틀 속에서도 묵묵히 삶을 지켜온 몸에 대한 소박한 예배와 수고로운 연금술사의 이마에 고요히 깃드는 주름의 평화에 대해서. 가장 세속적인 동시에 성聖스러운 공간. 그래서 목욕탕이라는 공간은 손이 닿지 않는 나의 슬픔, 나의 등에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는 곳. 이때 언어는 의미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용법으로 작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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