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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경미 
Subject  
   페루에서 온 그녀, 를 읽고
페루에서 온 그녀



어쩌다 산골 외진 주유소까지 흘러 왔는지
살아본 적 없는 계절이 몇 번이나 지나도록
빨간불이 들어와 깜빡이는
제 가슴에 기름을 붓고 있는 그녀

크고 검은 눈에서 한 음절씩
뚝,
뚝,
떨어지는 말, 그녀의 놓쳐버린 말 사이로
겨울 뻘밭에 부려지는 바람 같은
한 생이 빠져나간다

돌아가는 날, 그녀를 배웅하던
저만큼이나 커다랗고 깊은 눈빛들
벙어리 뻐꾹새 울음 같은
속울음, 한 덩이 꺼내어 달래줄까

쭈그리고 앉아 기름걸레를 빨며
몸 안에 일렁이는 기름을 다 태워
타오르고만 싶은
그녀의 크고 검은 눈 가득
파랑이 인다





**********

로맹 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주인공은 사랑도 혁명도 인생에서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마흔 일곱 살의 남자. 오로지 자연에서 위안을 구하기 위해 페루 해변의 모래 언덕 위에 카페를 지킨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이 바닷가에 내리꽂히다시피 툭툭 떨어져 죽는 수많은 새들. 먼바다를 떠돌던 새들이 왜 피가 식기 시작하면 죽을 힘을 다해 비상을 하여 부드럽고 따뜻한 이 해변의 모래에 부리를 묻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세상의 끝에서 자신에게 날아온 아름다운 새 한 마리를 풀어 주면서 삶에서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 희망의 집요함에 얼떨떨해진 채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페루에서 온 그녀. 로맹 가리가 세상의 끝에서 풀어 준 새 한 마리. 그러나 그 새는 주유소에 내려앉았다. ‘살아 본 적 없는 계절’ 이 몇 번이나 지나도록 ‘벙어리 뻐꾹새’ 의 울음을 속으로 밀어 넣으며 그녀는 주유소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기름걸레를 빨고 있다. 주유소란 어떤 곳인가. 낼름거리는 혓바닥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욕망의 불길 속에서. 삶은 외국어처럼 낯설다. 체념도 초월도 아닌, 그녀는 다른 것을 욕망한다. ‘몸 안에 일렁이는 기름을 다 태워’ 타오르고 싶은 열망. 이것을 慾망과 구분하여 欲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돌멩이에게는 돌멩이의 삶을, 반딧불에게는 반딧불의 삶을. 우리에게는 각자 고유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페루에서 온 그녀. 어떤 손길이 그녀를 점화시켜 찬란한 축제의 불꽃으로 터트려 줄 것인지.





진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아직 읽지 못했는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위 시 쓰면서 이 소설을 꼭 읽어봐야지 했었는데 무당님 글 읽고 다시 읽고 싶은 욕망이 생기네요.  200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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