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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경미 
Subject  
   보리님의 시를 위하여





올드블랙조, 스와니강, 매기의 추억 등과 함께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미국 민요 중의 하나인 ‘클레멘타인’ 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9C 중후반 미국은 골드러시 열풍에 휩싸입니다. 동부의 많은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 서쪽으로 서쪽으로 몰려갔습니다. 광산 채굴도 있었지만 많은 이주민들이 사금砂金 을 캐기 위해 강 주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한채…… 얼핏 강호한정江湖閑庭 의 낭만적 풍경이 떠오르기도 하는 노랫말 뒤에는 생존을 위해 고향을 잃어버린 자들 뿌리 뽑힌 삶의 애환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이 노래의 주인공도 그런 이주민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금을 찾아 헤매는 동안 어린딸은 강가를 뛰어놀았을 것입니다. 보리님의 시 「어느 오후에」에 보면 ‘문득 눈을 떠보니’ ‘사방에 시내가 가득’ ‘햇빛 속에서 혼자 고무줄을 넘었다’ 는 구절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일까요? 기약 없는 내일을 바라고 외롭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삶이었지만 소박한 행복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잠시 마음을 놓치는 사이 클레멘타인은 급류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병든 아비 홀로 두고 너만 어디 갔느냐…… 자, 이쯤에서 우리 시대 불후의 명작! 이라고 하면 약간 오바하는 느낌이 있어서 21C 불세출의 문제작! 보리님의 ‘클레멘타인’ 이라는 시를 감상해 봅시다.

난 아무래도 그 날을 고백해야만 한다네

붉은 얼굴-붉은 뺨-번지는 노을마다-제 상처 벌리고 우는-터진 입술-터진 솔기-누구나 보았던-(아, 이 지겨운-지겨운 상투)

우는 것과 나는 것
땅과 하늘
추락과 비상이 잠시 하나가 될 때
재 속의 불꽃처럼 멀리
저녁 새 하나 울며 날아라

용서해주세요 아버지
난 이렇게밖엔

- 보리님의 詩 「클레멘타인」 全文

클레멘타인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때 클레멘타인이 본 것은 무엇일까요? 우는 것과 나는 것, 땅과 하늘, 추락과 비상이 하나 되는 순간의 이러한 체험은 익숙하던 코스모스의 세계를 낯설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것은 의자 이것은 탁자 사물들에 대한 분별이 필요하다 할 지라도 그러한 현실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다른 시간의 여행을 통해 클레멘타인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리님을 통해 바리데기나 오르페우스와 함께 ‘클레멘타인’ 이라는 시인詩人의 또다른 상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나라 무속신화의 주인공인 바리데기는 어떻습니까. 여섯이나 되는 공주에 또 딸을 낳았다고 버려진 공주. 그래서 이름도 바리데기입니다. 갈대잎으로 만든 상자에 넣어 강물에 버려진 이 공주를 비리공덕할아비와 할멈이 거두어 키웁니다. 바리데기가 자라 자신의 근본을 묻게 되었을 때 아버지인 왕이 병들어 저승에 가야 구할 수 있다는 약을 누가 얻어올 것인가 하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여섯 공주 중 누구도 그 험한 노정을 엄두 내지 못합니다. 이때 바리데기가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저승 약수터를 찾아 떠납니다. 이잡기 삼년 빨래하기 삼년 나무하기 삼년 그렇게 물어물어 찾아간 약수터를 지키는 동자와 결혼하여 애 셋을 낳아주고서야 비로소 약수를 구해 병든 세상을 구합니다. 나중에 바리데기는 죽어서 오구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가 죽은 줄도 모르고 원한에 사로잡혀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씻어주고 천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은 말[言]을 건져 세상 속으로 풀어주는 시인의 일이 바로 이 바리데기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바하만의 표현을 빌자면 ‘삶의 현(絃) 위에서 죽음을 노래하는’ 오르페우스는 바리데기의 서양식西洋式 버전이라고나 할까요. 저승에 끌려간 아내를 위한 오르페우스의 연주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지옥문을 지키는 개들까지 눈물을 줄줄 흘렸다니 시공時空은 물론 생사生死까지 넘나드는 이러한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카오스chaos 는 무질서가 아닙니다. 컵이 볼 때 주전자는 다만 ‘컵이 아닐’ 뿐이지요. 코스모스cosmos 의 굳어진 질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힘을 우리는 카오스에서 빌어옵니다. 그 매개자로서의 시인. 보리님의 시에서 이런 약동하는 생명의 에너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동시에 우리가 한 위대한 시인의 탄생을 예감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지성知性 은 물질物質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생명生命 을 이해할 수는 없다고 베르그송은 말했습니다. 앎이란 자기 한계의 인식이며 따라서 진정한 앎이란 무지無知 의 자각, 습관적인 자기 인식의 틀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생명의 직관-보리님의 시에서 우리는 그러한 예지력銳智力 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를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 음악성과 회화성을 일반적으로 말하는데 현대로 올수록 음악성보다 회화성이 강조되어 이야기되곤 합니다. 음악성-리듬rhydm 을 공유한다는 것은 정서를 공유한다는 뜻인데 현대의 파편화된 삶은 그것을 점점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제 시에서 음악성은 거의 느낄 수 없거나 아니면 그것이 있다고 해도 지극히 개별화된 정서의 리듬이어서 공감하기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리님의 시가 의미mean나 이미지image로보다 먼저 리듬으로 와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대인이 잃어버린 시간-거대한 원체험을 클레멘타인이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1+1=2 의 합리적인 세계에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신화적 시간, 새로운 현대의 신화-클레멘타인을 보리님의 시를 통해 만나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입니다.
클레멘타인의 시간! 이것은 보리님의 시에서 ‘그대가 영원히 없다 해도/거짓말은 아니었어’ 봄밤의 미열微熱 로 나타나기도 하고 (「봄밤」)  다양한 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기동일성의 폐쇄회로에 균열을 일으키며 전언傳言을 보내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귀뚜라미」) 고압선 위에서 노래하는 새 (「강화에서」) 몸통이 없어도 푸르게 살아나는 무청(「오후에」) …… 단일한 의미 체계에 틈을 만드는, 그래서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소통과 순환을 추구하는 보리님의 시들을 하나의 의미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무모하거나 어리석은 일에 속할 것입니다. 다만 보리님이 창조한 ‘클레멘타인의 시간’ 속에는 자기 날개가 무거운 새(「새」)의 안간힘을 응원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구슬님의 아름다운 동화 『새들이 지키는 마을』에 써있듯이 새는 날개가 아니라 바람을 타는 힘으로 날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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