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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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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mel90] 나루님의 '길'을 읽고




          외등이 걸린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서자
          오래 기다린 길들이 흔들린다
          길 하나가 흔들리자
          불빛들 자욱하게 풀어진다
          초록으로 불려야 늘씬한 계절의 하루이던
          풀들은 말라 있다
          서러웠던지 외로웠던지
          강마른 내 하늘에도
          그리움은 거덜나
          바람도 목울대를 죽이고
          가볍게 돌아서던 발걸음

          가벼움은 삶의 엷은 아픔이라고
          어둠에 몸을 적신 사람들은 말이 헤프다
          술잔을 털어 적신 입술에서
          내 이름이 마른다, 길 위에서
          누가 꽃을 부르듯 나를
          불러온 적 있던가
          쓸쓸했으나 아득한 흉터에
          사무쳐 살 바르는 네가 남았다

          계절 한 잎 부리에 물고
          떼 지어 새들은 떠나간다,
          깊을수록 속을 감추는 굽은 길 위
          멀리서 돌아온 흐린 풍경이
          밥상처럼 차려졌다




  길은 주제나 정서를 표현하는 等價物로서는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소재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路程을 드러내는 시를 쓰
고 있으며 자기만이 알고 있는 길에 대해 쓰려고 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모
두 길 위에 놓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길은 우리가 어떤  곳을 지나왔는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보여준다.  말하자면 路程記는 존재하는 것들의 실존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나루님의 <길>은‘어둠의 경계를 넘어서’야 인식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길 하나가 흔들리자/불빛들 자욱하게 풀어’지는  그 경계는 실존에  대한
인식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話者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길
위의 풍경은 그러나 그다지 밝지가 않다. ‘풀들은 말라 있’고 ‘그리움은
거덜나’있는 곳이다. 아마도 바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목울대
를 죽이고’ 발걸음을 가볍게 돌려야 하는 그런 곳일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서 話者는 가벼움에 대해 경계할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바,그 傳言의 내용은 우리가 ‘서럽다’, ‘외롭다’, ‘그립다’라는 감정
을 옅은 아픔으로 헤프게 引用하고 있다는 것이다. 2연 4행에서 話者는‘길
위에서/누가 꽃을 부르듯 나를/불러온 적 있던가’라고 회상의 형식을 빌어
말하고 있는데, 이 陳述은 진지한 감정이 아닌, 감정의 진지함으로 삶의 태
도를 轉向할 것을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듯이 읽힌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 모든 불찰에도  불구하고 話者는 독자를 향한 따스한  
연민의 감정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 길은‘쓸쓸했으나 아득한 흉터에/사무
쳐 살 바르는 네가 남’ 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점이 작품 <길>의 매
력이라 하겠다.

  '밥상처럼 차려’진 ‘흐린 풍경’을 나는  감정의 진지함을 가지고 ‘깊
을수록 속을 감추는 굽은 길 위’에서 오래 들여다 보고 있다. 몸이 따스해
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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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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