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80   4   1
  View Articles

Name  
   시인통신 
Subject  
   [camel90]벼랑 끝에 혼자서기 - 보리님의 시를 읽고 -
벼랑 끝에 혼자서기
                    

  다양한 방법의 표현들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주제의
독특함도 중요하려니와  시인의 개성은 '표현의 독특함' 때문에 더
욱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무엇에 대해 말할 것인가 만큼이나 어떻
게 말할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말하자면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는 의미이다.
  보리님의 詩篇에는  언어조작에 의한 방법보다는 語調를 통해 주
제를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 점은 이미 시학님의
시평에서 확인한 바이다. 보리님의 '語調'에는 세상을 괴로움의 대
상으로 인지하는 이유와 자신이 괴로운 이유가 幼兒의 語調를 통해
代位되어 나타난다. 이 어우러짐이 그녀의 시편들을 독특한 개성의
세계로 읽히도록 한다.  그 세계의 입구에 <어느 오후>가 있다.

     문득 눈을 떠보니
     찬란했다
     그냥 찬란했다

     누가 뭐래도 찬란했다

     지금 나는 여섯살
     더도 덜도 아닌 여섯살

     사방에 시내가 가득-
     정말 다행이야

     문득 작은 시내들이 흘렀다
     한걸음만 건너뛰면 나는 다섯살

     정말 다행이야

     햇빛 속에서
     혼자 고무줄을 넘었다

     나리나리 개나리-


                    ― <어느 오후> 전문
  
  <어느 오후>에서 시의 화자는 시냇가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
는 여섯 살 된 아이다. (굳이 그 아이의 성별을 여성으로 한정하고
싶지는 않다. 혼자 고무줄을 넘는다는 행위 때문에 그 아이의 性을
여성으로 제한한다면 고무줄 넘는  놀이에 내포된 의미가 축소되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세상이 '누가 뭐래도 찬란'하다는 것과 자신
이 '더도 덜도 아닌 여섯 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가
지의 주장이 담긴 1∼3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세상이 '누가 뭐래도 찬란'하다는 아이의 주장에 논리적 근
거가 없다. '문득' 또는  '그냥 찬란'할 뿐이다. 이런 방식의 주장
은 여섯 살 된 아이에게나 허용되는 것이다.  
  둘째,과거형 서술어미가 1연에 쓰였던 것과는 달리 3연에서는 현
재형 시간 부사 '지금'이 쓰이고 있다.  이는 과거 회상을 현재 시
제로 표현한  것으로써 과거의 현재화, 즉 과거와 현재가 통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섯 살의 나이는 물리적 단위가 아닌 정
신적 시간 단위인 셈이 된다.성인인 화자가 아이의 語調를 빌려 주
제를 드러내는 방식을 보리님은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 살 어린 아이의 語調를 통해  시인이 전하고자 하
는 바는 무엇일까? 어린 아이의 특질은 여러 묶음으로 범주화할 수
있겠지만 통합성과 유희성,특히 통합성 측면에서 시인의 의도를 살
펴보기로 한다.
  통합(統合)을 지향하는 행위는  성장의 한 시기를 兒童期라고 구
분짓게 만드는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이다.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려
는, 사물과 나를 일치시키려는 경향은 확실히 성인에게서는 발견하
기 어려운 능력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타인과 나를 구분지으려
는― 소통단절 ― 경향이 두드러짐을 의미하며 사물과 나를 일치시
키는 능력의  상실을 의미할 것이다.  '햇빛 속에서/혼자 고무줄을
넘'는 단순한 동작을 하면서도 '나리 나리 개나리'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은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外物과 自我를 일치시켰을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의 총체적 표현인 것이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을 자신이 하는 놀이의 협력자요 동반자로
받아들인다.
  '사방에 시내가 가득'한 것이  아이에게 '정말 다행'스럽게 받아
들여지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겠다.
  시내는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는 소통단절의  이미지도 내포하고
있다. 話者는 '한걸음만 건너뛰면 나는 다섯 살'이라는  진술을 통
해 자신이 시내를 건널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
고 있다.이쪽과 저쪽이 아이에게는 동일한 것이다. 시내를 건널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다.
  古代詩歌 <공무도하가>는 外物에 대한 지아비와 지어미의 세계관
을 대조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공무도하가>는 강물을 건널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자와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자로
구분하여 후자의 비극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兩者에게서 보여지는 이 차이점은 중요하다. 부정적 세계
관―白首狂夫의 妻에게 강물을  건넌다는 행위는  이별이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녀의 세계관은 고통 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건널 수 없는 강,  요단강 이쪽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눈물을 흘리는 것 뿐이다.  인식체계를 이쪽과 저쪽, 이승과 저승,
此岸과 彼岸으로 나누는 이 현실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의사전달이
끊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백수광부는 강물을 건널 수 있는 대
상으로 받아들이며  이쪽과 저쪽이 동일한, 통합성을 실현할 수 있
는 대상으로 여긴다.아마도 그는 술에 취해 강을 건너려 했던 것이
아니라 즐거움에 취해 그러했으리라. 극단적인 두 이미지를 통합하
는 일은 확실히  凡人에게는 고통이며 시인에게는 즐거움으로 보인
다. <어느 오후>에는 어린아이의 그러한 특징인 통합성과 유희성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어린 아이의 어조를 빌려 쓰는  보리님의 의도는 통합성의  지향
또는 그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첫눈-k에게 감사>에서는 통합성
이 지켜지는 세계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밖에서 수런수런 소리 들렸죠, 누군가 날 기다리는 것만
     같이요, 햇님이 창틀을 한칸씩 비껴갔어요. 일어나 방문을
     열었지요, 알싸한 공기, 쏟아지는 햇살……

                         ―<첫눈-k에게 감사>중에서

  한 아이의 분만과정을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시인의 인식체계가
처음 형성되었던,  통합성의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세계에서는 맨발에 차가운 마룻장도  '노래하듯 삐걱'이고  있으며
눈이 내린  마당은 '희고 환한 것으로 가득'한 곳으로 의미가 확장
된다.

  그러나 보리님의  목적은 단순히 그러한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리님의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이 세계의 참모습에 대해 '문득' 어
른의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입구를 지나 보리님의 시세계로 들어가면  그 중심에 <그리고 당
신, 내 인생에 불을 켜주신>이 있다.  성인의 어조를 통해 그 시가
보여주는 '세상의 참모습'은 참담하다.  그것은 통합성이 깨져버린
이 세계에 대한 고통스런  인식이다.  '시내'의 이미지는 변형되어
'깊숙한 크레바스'가 되거나 '검고도 날카로운 틈'이  되며 '온통
균열'이고 '환멸'이된다. 그것들은 '건널 수 없는 깊은 간극'의 모
습으로 '나와 너, 거기와 여기 사이'에 있다.'추락해도 죽을 수 없
는 그런 벼랑' 끝으로 '나는 내쫓긴거야  나는 버림받았어'라는 화
자의 절규는 마침내 '나는 저주 받았어'라는 결론에 이른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성장하며 욕망은 그것을  지닌 자를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끊임없이 떠밀어버린다. 어른이 된다는 것
이 슬픈 까닭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힘에 의해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간다는 사실을 자신이 알게 되기 때문은 아닌지.

     신물나도록 흔한 질서 속에
     한번만
     당신과 나란히 앉아보고 싶단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중략>
     저 달을 갖고 싶어
     그러나 이 한없는 욕망
     끝간데 없이 깊어만지는

                       ―<삶은 다른 곳에> 중에서

  욕망이 한 사람을  다른 한 사람 쪽으로  떠밀었지만 양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저주가 아닌 다른 말로 위로할 수 있겠는가!
욕망의 실현을 위해  그녀는 날개 달린 새가 되어 飛上하지만 결국
확인한 사실은  통합성의 상실, 하늘과 땅 사이의 간극, 즉 '아찔한
허공'일 뿐이다. 아찔하다는 수식어는 그 간극이 건널 수 없는 대상
이라는 인식의 표현아니겠는가.

     난 정말 하늘이 무서워
     못내 박차고 날면
     몸 아래는 어느새 아찔한 허공인데

                         ―< 새 >중에서 4연

  욕망의 댓가로 그녀가 지불한 것은 '푸르고 아름다운 땅/단단한 초
원'인 셈이다. 수식어 '단단한'은( 어째서 굳이 '단단한'인가를 생각
해보라) 그 초원에 크레바스가 없고 검고 날카로운 틈도 없으며 일체
의 균열도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단한 초원을 빼앗긴 것은 통합
성의 상실, 유년의 상실을 뜻하게 된다.상당히 많은 보리님의 시들이
통합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존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국 끓이려고
     묵직헌 무 대가리 댕강
     끊었다.
     초라하게 뜯긴 정수리께
     초록빛 풀밭의 추억 언뜻 남아 있어
      ……중략……
      
                      ― <오후에>중에서 1연

  몸통을 잃고 작은 접시 위에 놓인, 누군가 자작자작 부어주는 물에
의지해 살아가는 무 대가리는 '헛되이 희망거는/어떻게든 서슬 푸른/
목숨, 어쨌거나 살아지는' 다름아닌 우리의 모습이라 하겠다. 마침내
몸통이 잘린 채  ('잘린다'는  시어에 담긴 이미지는 분열, 통합성의
상실이다.)  크레바스와 날카로운 틈과 온갖 균열을 의식하며 살아가
는 그녀는 '상처로 보금자리를 삼을 줄/누가 알았겠냐고/상처의 자리
에서 살게 될 줄/차마 몰랐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고백> 중에서.

  그러나 고백도 때론 힘이 되는가?무엇보다도 보리님 시세계에서 희
망을 감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성의
세계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녀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리님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개의 중심축은 첫째, 욕망을 지
닌 댓가로 통합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과  둘째, 통합성을 상실한
세계의 고통스러움을  느끼도록 하여  통합성으로의 회귀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꽃사슴>의 3연을 살펴보면,통합성이 깨져버린 현실로 쫓겨온 화자
가 다시 통합성의 세계로 회귀하고자 하는 자기연민으로 일관되어 있
음을 알 수 있다. 흐느끼고 헐떡이며 쫓기는 꽃사슴. 자신의 등을 과
녁삼은 화살이 누구로부터 날아오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나 이
외에 아무도 달리지 않았다'라는 인식은 절망의 지극함을 보여준다.
'나는 처음 울음을 터트린 흙 위에 머리를 댄다 여기가 내 무덤이다'
무덤은 죽은 자가  묻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곳이다. 무덤은 임산부의 배처럼 둥근 형상이다. 회귀를 꿈꾸는 것이
다.

  통합성으로의  회귀를 꿈꾼다는 관점에서 <출근길에서>는 의미있게
읽힌다. 먼저 시의 화자가 어린 아이의 어조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어린아이에게는 출근이라는 노역이 없다!) <출근
길에서>는 통합성이  깨진 세계를 '바람 한 점 없는 조각배 위'에 있
는 '천지는 온통 물바다'지만  '그러나 타는 듯한 갈증'이 멈추지 않
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고통의 바다 한가운데서 어른인 화자
는 어린아이의 어조를 빌려 '너도 목마르지?'라고 묻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너도 목마르구나!'로 표현되었으면 더 나았을 것 같다)
그리고 화자는 '그 중심에/손을 흔든다'.어린아이의 특징인 통합성과
유희성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표현조작'이라는  용어를 임의적으로 만들어
보았다. 통합성의 세계로  회귀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리님이 즐겨 사
용하는 것이 '표현조작'이다.그것은 양극단에 놓여 있는,대립되는 이
미지를 병치시키는 방법이다.  이쪽과 저쪽, 나와 너와 같은 건널 수
없는 간극을 건널 수 있는 간극으로 전환하기 위한 고의적 표현인 것
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오르막이었으나
     또한 내리막이었고
     미끄러운 길이었으나
     또한 푹푹 빠졌고
     툭툭 탁탁
     온 귓가에 고동 소리
     울리다 사라지다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몰랐으나
     또한 아는 것도 같았네

                         ―<꿈2>중에서 2연,

     빛났던 적
     아름다웠던 적
     향기로웠던 적
     없고

     없고
     없지만

     있어 나는 있어  

                       ―<바위>중에서

  등등인데 이런 식의 표현은 보리님의 시편 도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보리님의 시에서 詩的 언어와 非詩的 언어가 병치되어 쓰
이는 것도 '표현조작'이라는 용어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우는 것과 나는 것
     땅과 하늘
     추락과 비상이 잠시 하나가 될 때
     재 속의 불꽃처럼 멀리
     저녁 새 하나 울며 날아라  
                  
                       ―<클레멘타인, 3연>

  클레멘타인, 그녀는 지금 '고통/과 욕망 사이에서' '맨솔로 타협'
을 하고 있는 중이다.욕망의 힘이 그녀를 통합성의 세계로부터 멀어
지게 했다면 고통의 힘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그녀의 등
을 떠밀 것이다. 그러므로 벼랑 끝에 선 시인이여, 두 눈 뜨고 앞으
로 한 발 내딛으라. 그곳이 본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아니었음을
시인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後記 : 번지점프하는 광경을 생각해 봤다.점프대 위에서 내려다보
이는 '아찔한 허공'.  시평을 쓰면서 그 광경을 떠올렸던 까닭은 무
엇이었을까? 사람들은 그 '아찔한 허공'을 '건널 수 없는 간극'으로
밖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질긴 끈에 발목을 동여 매는 것
이리라.통합성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유희성만을 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유년이란 단지 멀고 먼 기억일 뿐
이다.

Prev
   부드러운 변명 [1]

정경미
Next
   [camel90] 나루님의 '길'을 읽고

시인통신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ty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