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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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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의 연작시 주제, 폭설 혹은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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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장석남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꽃집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식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드럽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고 전에 꿈구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대적(大寂)의 이력서다
☞ 출전: 장석남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사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하우게

내리는 것을
어찌해야 하나,
춤추며 팔랑거리는 솜털에 대고
둔중한 창을 겨누어야 하나,
어깨를 구부린 채
오는 대로 받아야 하나?
어스름이 내릴 무렵
막대를 들고
마당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도와주려고.
별 힘도
안 드는 일이다.
막대로
툭 두드리거나
가지 끝에서
휙 흔들면 그뿐-
사과나무가
제자리로
튕겨 돌아오는 동안
털린 눈을 고스란히
맞기는 해도.
너무 자신만만한 것이다, 어린 나무들은,
바람 말고는 어디에고
숙이는 법을
아직 배운 적이 없다
이 모든 일이
다만 재미요
짜릿한 놀이일 뿐.
수확을 맺어본 나무들은
눈을 한 아름 얹고도
아무렇지 않다.
☞출전:하우게 시선집,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실천문학사

겨울 풍경
-황순원

눈은 내리고
해거름에서 담배 한 대 참은 족히 지난 시각
철부지 아이들의 떠드는 모양 멀리 물러나고
팔 낀 연인들 어룽히 드러났다 그냥 풀리어드는
뭉크보다 조금은 더 어둑신한 속에
노인이 하나 서 있다
눈은 내리고
☞ 출전 : 황순원 전집 11, <시선집>, 문학과지성사


폭설
어느 눈 오는 날
-진은영








는 공사판으로 내려온 눈송이
한 일이라곤 증발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눈송이들이 인부의 어깨를 적시는 동안
다른 눈송이들이 거리를 덧칠하는 동안
다른 눈송이들이 아이들의 다리를 흔드는 동안


한 일이라곤 증발하는 일,
낼름거리는 불꽃의 드럼통 속으로
☞ 출전 : 진은영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겨울 밭, 봄봄
-이진명

눈이 온 하루를 내리는 날
내 밭에만 안 내리면 어쩌나
남모르게 가책되는 일 있는 사람처럼
돌아앉아 밭 쪽으로는 고개 돌리지 못했다
夏節것들 다 깨끗이 비워냈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일 뿐이고
걸리적거리는 푸르딩딩한 것들 남아 있어
뿌리를 썩이거나
잔뜩 얼어 부어 있거나 할 것이기에
눈이 제자리를 一色으로 펴기에는
푸르딩디한 것들 지저분하게
하절과 동절을 이간질할지도 몰랐다
돌려앉아 애를 먹다가
못참고 고개를 확 돌려봤더니
봄 봄 스프링!
내 밭에도 눈이 덮였다
다른 밭보다 못하지 않게 두툼히
제철 눈이 희게 제대로 덮였다.
☞출전: 이진명 시집 , <단 한사람>, 열림원

시집간 우리 누이들처럼
-이성복

눈은 내리면서
제 빛깔과 소리를 얻는다
서로 다른 동네로
시집간 우리 누이들처럼

눈은 녹으면서
제 친정으로 간다
족두리도, 신발도 없이
길 없는 길을 돌아가는 것이다
☞출전: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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