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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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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테의 수기 (11)
말테의 수기 (11)

··· 릴케



오랑주에 있는 고대 로마의 노천극장에서였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다만 극장의 전면이 참담하게 무너져 있는 것만을 의식하면서, 매표구 옆의 유리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쓰러져 있는 원기둥과 작달막한 자줏빛 당아욱 사이에 섰다. 잠시 이것들에 조개껍질처럼 생긴 관객석이 가려졌다. 관객석은 오후의 그늘로 나뉘어져서 움푹 파인 거대한 해시계 같았다. 나는 서둘러 그리로 다가갔다. 옆으로 늘어선 좌석들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이런 주위 환경 속에서 점점 왜소해지는 것을 느꼈다. 좀더 위쪽으로는 몇 사람의 외국인이 한가로운 호기심을 보이며 뿔뿔이 흩어져 둘러서 있었다. 그들의 옷은 불쾌할 정도로 너무 선명했는데 그 수준은 말할 만한 가치도 없었다. 그들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내 초라한 모습에 놀라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몸을 돌렸다.
아아, 나는 전혀 예상도 못했었다. 극이 공연되고 있었다. 거대하고 초인적인 연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천극장의 무대 뒤에 서 있는 압도적인 벽이 연출하는 연극이었다. 그 벽은 수직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크기로 인해 진동하는 듯했고, 거의 짓누르는 듯했지만 갑자기 그 엄청난 크기가 적당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행복한 놀라움에 빠졌다. 우뚝 솟은 무대 벽은 그늘로 인해 얼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어둠이 몰려 있어서 입처럼 보였고, 위쪽으로는 처마 돌림띠가 가지런히 곱슬머리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모든 것을 변장시키는 강력한 고대의 가면이었다. 그 가면 뒤에서 세계가 얼굴과 합쳐졌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빨아들이고 있는 텅 빈 존재가 거대한 원형의 관람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저 아래 무대에 있었다. 신들과 운명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눈을 높게 들어 바라보면) 무대 벽 끄트머리 위로 영원한 하늘이 등장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순간 우리 시대의 극장에서 영원히 떠났던 것 같다. 우리 시대의 극장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벽 (성자를 그린 러시아 교회의 벽) 이 철거된 무대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 단단한 벽으로 기체 형태의 행위를 압축하여 마침내 묵직한 기름 방울로 짜낼 수 있는 힘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벽을 치워버렸다. 우리 시대의 연극은 구멍이 성성한 거친 체와 같은 무대 사이로 덩어리로 떨어져 쌓이고, 양이 좀 불어나면 곧 치워진다. 그것은 거리나 집에서 볼 수 있는 미숙한 현실과 마찬가지다. 다만 현실에서 하룻밤에 일어나는 사건보다 좀 더 많은 사건이 연극에서는 함께 벌어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에게 신이 없는 것처럼 극장 또한 없다. 우리가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들 자신의 특별한 생각이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할 때에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공동의 고뇌라는 벽에다 대고 외치는 대신에 우리의 이해력이 다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묽게 희석시키고 있다. 고뇌의 벽 뒤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모여들어 자리잡고 있는데도 말이다.)

만일 우리가 극장을 갖고 있다면, 그대 비극적인 이여, 그래도 그대는 그대가 보여주는 고통에 허겁지겁 호기심을 채우는 사람들 앞에서 계속 그토록 가냘프고 적나라하게, 가면도 없이 무대에 설 것인가? 말할 수 없이 감동스러운 그대여, 아직 아이였던 그대가 옛날 베로나에서 연기를 하면서 자신을 감추는 가면처럼 장미꽃을 서서히 앞으로 들어올렸을 때, 이미 그대의 고뇌의 실체를 예감하지 않았던가.
그대가 베우의 자식인 것은 사실이다. 그대의 가족들은 연기할 때면 관객에세 보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대는 이러한 방식을 깨뜨렸다. 마리안나 알코푸라두에게 수녀 생활이 스스로 예감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변장이었던 것처럼, 그대에게도 배우라는 직업은 변장일 뿐이었다. 그대의 변장은 아주 치밀하고 영속적이어서 그 속에서 그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의 사람들이 행복한 것처럼 한없이 그대의 고뇌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대가 가는 모든 도시에서 사람들은 그대의 연기를 보도했다. 그란 그대가 날마다 희망을 잃어가면서도, 오로지 자신을 감추기 위해 문학작품을 계속 그대 앞에 들어올리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곳은 모두 머리카락이나 손, 또는 무엇인가 촘촘한 것으로 가렸다. 투명하게 비치는 것은 입김을 불어 흐릿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자그맣게 만들어,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는 몸을 숨기고는 행복한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적어도 천사 정도는 되어야 그대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그대는 조심스럽게 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들 그 흉하고 휑뎅그렁하며, 눈들만 반짝이는 관객석에서 그대를 내내 바라보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대, 그대, 바로 그대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는 심술궂은 그들의 시선에 맞서 손가락으로 십자 표시를 하며 팔을 내뻗었다. 그들이 갉아먹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그들에게서 다시 낚아챘다. 그리하여 그대 자신이 되었다. 그대와 함께 연기하는 다른 이들은 용기를 잃었다. 암표범과 한 우리 안에 갇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무대의 측면을 슬슬 기어다니며 그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대사를 말했다. 그러나 그대는 그들을 끌어내서 앞에 세워두고, 마치 현실 속의 인물에게 하듯 그들을 대했다. 헐렁해진 문, 가짜로 그려놓은 커튼, 뒤쪽 면이 없는 무대도구들이 그대에게는 모순으로 다가왔다. 그대는 자신의 마음이 끊임없이 거대한 현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서, 화창한 늦여름날 긴 거미줄을 걷어내듯 관객들의 시선을 다시 한 번 떨쳐버리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극단적인 것을 보기가 두려운 관객은 서둘러 박수 갈채를 보냈다. 마치 그들의 삶을 바꾸라고 강요할 것만 같은 무엇인가로부터 마지막 순간에 몸을 돌리기 위한 것 같았다.

사랑받는 이들은 잘 지내지 못하고 위험에 처해 있다. 아아, 그들이 스스로를 극복하여 사랑을 베푸는 이들이 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들은 아주 안전하다. 사랑하는 이들은 아무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의 비밀을 털어놓는 경우도 없다. 비밀은 사랑하는 여인들의 마음속에서 온전해졌다. 그들은 그 비밀을 꾀꼬리처럼 노래 부른다. 부분이란 없다. 그들은 한 남자에 대해 슬퍼하고 탄식하지만 온 자연이 그들에게 화음을 맞추어준다. 그것은 영원한 이에 대한 탄식의 노래다. 사랑하는 여인들은 자신을 버린 남자를 급히 뒤쫓는다. 그러나 벌써 첫 걸음에서 그를 추월해버린다. 이제 사랑하는 여인들 앞에는 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들의 전설은 리키아까지 카우노스를 쫓아간 비블리스의 전설이다. 물밀 듯 밀려오는 사랑의 마음이 카우노스의 자취를 쫓아 여러 나라로 비블리스를 내몰았다. 마침내 그녀의 힘이 다했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가 너무도 강렬한 감동을 주었기에 그녀는 쓰러졌지만 죽음을 넘어서 샘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둘러 달려가는 샘이 된 것이다.
포르투갈 여인 마리안나 알코포라두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녀는 마음속에서 샘물이 된 것만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대 엘로이즈도 그렇지 않은가? 그대들의 비탄의 소리가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사랑하는 여인들, 가스파라 스탐파, 디에 백작부인, 클라라 댕뒤즈, 루이제 라베, 마르셀린 데보르드, 엘리자 메르쾨르, 그대들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대 가련한 아이세, 그대는 망설였고 그래서 굴복하고 말았다. 줄리 레피나스는 지쳐버렸고, 마리안느 드 클레몽은 사랑이라는 행복한 공원의 쓸쓸한 전설이 되었다.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언젠가 어렸을 때 집에서 보석함을 찾아냈다. 두 손을 합친 정도의 크기로 짙은 녹색의 모로코 가죽으로 된 부채 모양의 상자였는데, 가장자리에는 꽃무늬가 찍혀 있었다. 나는 보석함을 열어 보았다. 비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내가 보석함을 열었을 때에는, 텅 빈 공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만을 보았다. 더 이상 새것으로 보이지 않는 밝은 색깔의 비로드, 비로드 바닥 위로 튀어나와 있는 나지막한 돌출부, 그 안쪽으로 비애의 흔적을 안고 공허하게 패어 있는 밝은 홈을 보았을 뿐이다. 한 순간쯤은 그 쓸쓸함을 참을 만했다. 그러나 사랑받다가 뒤에 남겨진 여인에게는 아마도 영원히 쓸쓸함이 남을 것이다.

그대들의 일기장을 뒤적여보라. 해마다 봄이 되면 분출하는 새해가 마치 그대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지 않았는가? 그대들의 마음속에 즐거워지려는 기분이 꿈틀대서 바깥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나가보면, 공기 속에서 무언가 낯설음이 느껴지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대들은 갑판 위를 걸어가듯 불안하게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서는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바로 그것이었다) 겨울과 묵은해를 그 속으로 끌고 온 것이었다. 그대들에게 봄은 기껏해야 지나간 해의 연속이었다. 그대들의 영혼이 봄기운과 함께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대들은 갑자기 사지가 무거워지고, 병이 날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 예감을 그대들은 너무 가벼운 옷차림 때문이라 돌리고, 어깨에 걸친 목도리를 조여 매고, 가로수 길을 끝까지 달려갔다. 그리고는 둥그런 꽃밭가에 서서 뛰는 가슴을 안고, 모든 것과 하나가 되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울었다. 그 새는 혼자였다. 그대들의 동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아아, 그렇다면 그대들은 이미 죽었어야 했단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새해와 사랑을 극복한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에게는 아주 새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꽃과 열매는 익으면 땅에 떨어진다. 짐승들도 서로를 느끼고 정을 나누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신을 갈구하는 우리에게 끝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자꾸만 유예시킨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1년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 모든 세월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신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벌써 밤을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한다. 그러고 나서 병을, 그리고 사랑을 극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클레망스 드 부르주는 막 피어오르려 할 때 죽어야 했다.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처녀였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다룰 수 있었던 악기 중 가장 아름다운 악기는 아주 작은 울림으로도 잊을 수 없는 연주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처녀다움은 너무나도 고귀하고 결연했기에 사랑이 넘쳐흐르는 한 여인, 루이제 라베가 이 피어나는 처녀의 가슴에 소네트 시집을 바쳤다. 그 소네트에는 시행마다 달랠 수 없는 사랑이 들어 있었다. 루이제 라베는 기나긴 사랑의 고뇌가 이 처녀를 놀라게 하리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베는 밤이면 더욱 고양되는 사랑의 그리움을 처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광대한 우주와 같은 고통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녀는 처녀를 아름답게 해주는 막연한 기대의 아픔과 비교할 때 자신이 경험함 고뇌는 그에 미치지 못함을 예감했던 것이다.

내 고향의 처녀들이여. 그대들 중의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어느 여름날 오후에 어둑해진 도서관에서 1556년에 장 드 투르네가 펴낸 루이제 라베의 그 작은 책자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서늘하고 반질반질한 책을 들고 벌들이 윙윙대는 과수원이나 그 너머 달콤한 향기 속에 순수한 단맛의 침전물이 들어 있는 협죽도 꽃 사이로 간다면 좋겠다. 그 책을 되도록 어릴 때 찾을 수 있으면 좋으리라. 처녀들이 눈으로는 자신을 보기 시작했지만, 눈보다는 아직 어린 입으로 사과를 한 입 커다랗게 베어물고 입 가득 우물거릴 수 있는 그 시절에 발견하면 좋으리라.
그러고 나서 더욱 감동적인 우정의 시기가 오면 처녀들이여, 서로서로를 디카나 아나크토리아, 기리노, 아티스라고 부르는 것이 그대들의 비밀이 될 것이다. 누군가, 아마도 어느 이웃 사람이, 젊었을 때 여행을 많이 했고 오래 전부터 별난 사람이라 불리우는 나이든 남자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들을 알려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복숭아를 먹으러 오라고, 또는 위층 흰 복도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보아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리딩어의 동판화를 보러 오라고 그대들을 가끔 초대하리라.
아마도 그대들은 그를 설득하여 이야기를 시키리라. 아마도 그대들 중에 그를 졸라서 옛 일기장을 가져오도록 할 수 있는 처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포의 몇몇 시구들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게 만들고, 세상을 등진 그 남자가 여가 시간에 종종 사포의 시를 번역하며 즐거움을 느낀다는, 거의 비밀에 가까운 사실을 실토할 때까지 계속 조를 것이다. 그는 이 일을 벌써 오랫동안 소홀히 하고 있었다고 고백해야 하리라. 그리고 그는 번역해놓은 것도 변변치 못하다고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처녀들이 졸라대면 이 악의 없는 친구들 앞에서 한 구절쯤 낭독해주면서 매우 즐거워하리라. 그는 그리스어 원문까지도 기억해내서 낭독해줄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번역은 아무것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에, 처녀들에게 매우 강렬한 불꽃 속에서 단련된 보석과 같은 저 순수한 언어의 아름답고 참된 조각을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이 모든 일을 통해 그는 다시금 이 작업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그에게는 청춘 시절과 같은 아름다운 저녁이 찾아온다. 이를테면 길고 긴 고요한 밤을 앞에 둔 가을 저녁이 찾아온다. 그리면 그의 서재에는 오랫동안 불이 켜져 있다. 그는 종이 위에 늘 몸을 수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방금 읽은 시구절을 다시 생각한다. 그러면 시의 의미가 그의 핏속으로 스며든다. 그는 아직 고대 그리스 세계에 대해서 이토록 확실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자신들이 출연하고 싶은데 이제는 끝나버린 연극을 애도하듯, 사라진 고대 세계를 애도하는 사람들을 거의 비웃고 싶어진다. 이제 그는 인간의 모든 일을 동시에 새롭게 받아들인 것만 같은 고대 세계의 통일성이 얼마나 역동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깨닫는다. 고대의 일관된 문화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기에 후세 사람들의 눈에는 완전한 세계를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거나, 이제는 그 전체가 사라져버린 과거의 문화로 생각된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도 않는다. 두 쪽의 반구가 하나의 온전한 황금 공을 만드는 것처럼, 고대의 세계에서는 사실 천상의 반쪽 삶이 지상의 반쪽 삶과 합쳐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자마자 그 속에 갇히게 된 정신들은 이 완전한 실현도 다만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무거운 천체가 무게를 잃어버리고 공간 속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황금 공의 둥그런 표면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세계의 슬픔이 조심스레 비쳤다.
그가, 이 고독한 이가 한밤중에 이런 생각을 하며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을 때, 창가 의자에 놓인 과일 접시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사과를 하나 집어서 책상 위에 놓는다. 나의 삶은 이 과일 주위를 어떻게 둘러싸고 있을까라고 그는 생각한다. 모든 완성된 것 주위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솟아올라 계속 커지고 있다.
그러자 홀연히 그 이루지 못한 것 위쪽으로 자그마한, 그러나 무한에까지 뻗어 있는 형상이 그에게 떠오른다. (갈리엔의 말에 따르면) 당시 여시인이라고 말하면 모두들 그녀를 말하는 줄 알았다는 바로 그 사포의 형상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헤라클레스의 위업 이후에 세계가 파괴와 개조를 열망하며 일어선 것처럼, 후세까지 지속되어야 할 기쁨과 절망이 사포의 마음에 의해 실현되기를 갈망하며 존재의 저장고에서 나와서 사포의 사랑의 행위 속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는 문득 온전한 사랑을 끝까지 완성하려 했던 사포의 결연한 마음을 알 것만 같다. 사람들이 이 점을 오해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미래의 사랑하는 여인상인 사포에게서 단지 감정의 과도함만을 보았을 뿐 사랑과 고뇌의 새로운 척도는 보지 못한 것도 놀랍지 않다. 그녀의 삶을 기록한 碑文을 그 당시 사람들 마음대로 해석한 것도, 사랑의 응답을 끊은 여인의 죽음을 사포의 탓이라고 돌린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아마도 사포한테 감화를 받은 여인들 중에서도 사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이가 있었을 것이다. 사랑의 활동이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 사포가 토로한 한탄은 자신의 포옹에 응답하지 않는 한 남자에 대한 한탄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에 필적할 만큼 자랄 수 없는 남자에 대한 한탄이었음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에 잠겨 그는 일어나 창가로 간다. 높다란 방이 그에게는 너무 낮아 보인다. 가능하다면 별을 보고 싶다. 그는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이러한 감동이 그를 사로잡는 이유가 이웃의 젊은 처녀들 중에 그의 마음에 드는 처녀가 있기 때문임을 안다. 그에게는 소망이 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 처녀를 위한 소망이다.) 그는 깊은 밤중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싹튼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 처녀를 위해 홀로 깨어 일어나, 사랑을 베푸는 여인인 사포가 얼마나 옳았던가를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사포는 두 사람의 결합이란 바로 고독을 더욱 깊어지게 만드는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性의 무한한 의도로 성의 일시적인 목적을 부수어버렸다. 그녀는 포옹의 어둠 속에서 만족을 구하려 하지 않고 동경을 찾았다. 연인 중의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그녀는 경멸했다. 그래서 자신의 잠자리로 데려온, 연약하기만 한 사랑받는 이가 그녀의 곁에서 사랑하는 이로 달구어져서 그녀를 떠나게 했다. 이러한 고귀한 이별에 의해서 그녀의 마음은 자연 그 자체가 되었다. 운명을 넘어서서 그녀는 예전에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신부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녀들의 결혼을 고귀하게 만들어주었고, 그녀들의 남편을 찬미했다. 그리하여 신부들이 남편을 마치 신처럼 받아들여서 마침내 그들의 훌륭함을 넘어서기를 바랐다.

아벨로네, 오랫동안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당신을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베네치아에서의 일이었다. 가을이었고 어느 살롱에서였다.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역시 외국인인 여주인의 주위로 몰려드는 그런 살롱 중의 하나에서였다. 그들은 찻잔을 손에 들고 둘러서 있었고,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옆사람이 베네치아식으로 울리는 이름을 속삭여주며 슬쩍 문 쪽을 가리킬 때마다 매우 기뻐했다. 그들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까지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어떤 이름에도 놀라지 않았다. 평소에는 경험하는 것을 매우 아끼는 그들이지만 이 도시에 와서는 잔뜩 부푼 기대감에 몸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언제나 특이한 것과 금지된 것을 같은 것이라 혼동하기에, 이 도시에서 혹시 자신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들의 얼굴에 뻔뻔스럽고 무절제한 표정으로 드러나 있다. 그들은 고향에서 음악회에 앉아 있을 때나 혼자서 소설을 읽고 있을 때 순간적으로 드는 그런 느낌을 이러한 감미로운 상황에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기분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전혀 준비 없이, 어떤 위험도 알지 못한 채 육체적 방종에 빠지거나 음악의 뇌쇄적인 고백에 탐닉하는 것처럼 그들은 베네치아의 실체를 조금도 알지 못한 채 곤돌라의 즐거운 도취에 몸을 맡긴다. 이제는 더 이상 신혼이 아닌 부부가 여행 내내 서로에게 악의에 찬 대답만을 일삼다가도 여기에서는 말없는 타협을 이룬다. 남편은 자신의 이상이 지쳐 졸음에 잠기게 되어 편안해지고, 젊음을 느낀 아내는 마치 자신의 이빨이 계속 녹아 없어지는 설탕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활기 없는 이곳의 토박이들에게 격려하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들은 내일이나 모레쯤 아니면 주말에 이 도시를 떠난다고 한다.
그때 나는 그들 사이에 서서 이 도시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기뻐했다. 곧 추워질 것이다. 그러면 외국인들의 선입견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 보드랍고 마취제 같은 베네치아는 몽롱한 외국인들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문득 다른 베네치아가 다가와 있으리라. 실제적이며, 깨어 있고, 깨질 정도로 단단하고, 전혀 몽상적이지 않은 그런 베네치아, 물 속으로 가라앉은 숲 위, 그 아무것도 없는 곳에 서길 원하여 강제로 물을 밀어내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베네치아가 다가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단련되고, 최소의 필수 불가결한 것만을 갖춘 베네치아의 육체 속에서 병기창이 밤새워 작업을 하여 피를 돌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육체에 깃들인 끊임없이 확장되는 끈질긴 정신은 그 어느 남국의 향기보다 더 강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소금과 유리를 다른 민족의 보물과 교환했던 이 암시적인 국가. 세계의 아름다운 균형추인 베네치아. 장식품까지 점점 섬세해지는 잠재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곳이 바로 이 베네치아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동안 내게는, 나는 이 도시를 알고 있다는 의식이 강렬한 항의가 되어 밀려왔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여기 여러 개의 살롱 안에 이 도시의 본질을 설명해주기를 자기도 모르게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이 도시가 향락이 넘쳐나는 곳이 아니라,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롭고 엄격한 의지의 표본임을 곧바로 이해한 젊은이가 있지 않을까? 나는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나의 진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진실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바로 나를 붙잡아서는, 내가 그 진실을 말하고, 변호하고, 증명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제멋대로 지껄여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오해를 증오한 나머지 혹시 내가 지금 손뼉을 쳐서 소리를 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기분 속에서 나는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환한 창가에 혼자 서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진지하고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이 아니라 입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 입은 내 얼굴에 분명히 나타나 있을 화난 표정을 반어적으로 흉내내고 있었다. 곧바로 내 표정에 포조한 긴장이 들어 있음을 느낀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고쳐 지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도 자연스러워지고 거만해졌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다음 우리는 동시에 서로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를테면 바게센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저 아름다운 베네딕테 폰 크발렌의 처녀 시절 초상화를 연상시켰다. 그녀의 눈에 어린 짙은 고요를 보니 목소리도 분명 맑고 나지막하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 밖에 머리를 땋은 모습과 입고 있는 밝은 색 옷의 목선이 코펜하겐식이어서 나는 그녀에게 덴마크어로 말을 걸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녀에게서 좀 떨어져 있었다. 그때 다른 쪽에서 그녀에게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손님을 좋아하는 우리의 여주인 백작부인도 따뜻하고 열광적이며, 들뜬 기분으로 많은 응원부대를 데리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노래 부르는 자리로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 젊은 처녀가 분명 이 모임의 그 누구도 덴마크어 노래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양해를 구하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역시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 그러나 이 환한 처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더 열성적으로 되었다. 그녀는 독일어로도 노래 부를 수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어로도”라고 누군가 자신에 차서 웃는 목소리로 심술궂게 덧붙였다. 나는 그녀가 이번에는 어떤 핑계를 대는 게 좋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거절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득하기 위해 오랫동안 웃고 있는 바람에 지쳐버린 사람들의 얼굴 위로 이미 냉랭하고 못마땅한 기색이 퍼졌다. 선량한 백작부인도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동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품위 있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녀는 승낙하고 말았다. 나는 실망한 나머지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눈길에 비난이 가득 차 올랐다. 그러나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런 내 눈길을 그녀에게 보여봤자 소용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나와 내 옆에 섰다. 그녀의 옷이 내게 어른거렸고, 그녀의 온기가 내뿜는 꽃향기가 내 주위를 감쌌다.
“정말로 노래 부르고 싶어요.” 그녀는 내 뺨에 대고 덴마크어로 말했다. “사람들이 원해서도 아니고 겉치레 때문도 아니에요. 내가 지금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말에서는 화가 난 듯한 초조감이 새어나왔다. 나도 그런 초조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말을 걸자 바로 사라졌다.
나는 그녀와 함께 멀어져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천천히 뒤따라갔다. 그러다 높은 문 옆에 멈춰 서서는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정돈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까맣게 반질거리는 문 안쪽에 몸을 기대고 기다렸다. 누군가가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노래라도 부르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나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동안에 그녀가 벌써 노래를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 노래가 서서히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외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형적인 이탈리아 노래라고 여기는 그런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녀는 그렇게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노래를 힘들게 들어올려서 너무도 무겁게 부르고 있었다. 앞쪽에서 나는 박수소리로 노래가 끝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슬퍼졌고 일종의 모욕감을 느꼈다.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나가면 따라나가려고 작정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적막이 일었다. 적막이 지속되고 팽팽해졌다. 그리고 이제 그 적막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아벨로네, 나는 아벨로네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힘차고 풍부했으며 무겁지 않았다. 단절된 곳이나 이음새도 없이 완전한 하나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독일 노래였다. 그녀는 꼭 필요한 것만 보여주려는 듯 그 노래를 이상할 정도로 단순하게 불렀다.

그대여, 나 그대에게 말하지 않겠어요
나 울며 밤을 지새운다고
그대의 존재가 요람처럼 나를 흔들어
나를 지치게 한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대여, 그대 또한
나 때문에 잠 못 이루어도
말하지 않는군요.
이 찬란한 침묵을
우리 버리지 말고
마음속에 간직한 채
그냥 견뎌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잠시 쉬었다가 머뭇거리면서)
저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세요
사랑의 고백이 끝나자마자
벌써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요.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누가 이 적막을 만들어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다음에야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서로 부딪히고, 서로 사과하고, 기침을 했다. 벌써 사람들은 희미하게 웅성대는 소음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결연하고, 폭이 넓으며 밀려오는 듯한 목소리가.

나를 고독하게 만다는 그대
그대를 나는 무엇으로든 바꿀 수 있어요.
그대는 잠시 그대의 모습이었다가
다시 살랑거리는 바람소리가 되고
또한 마르지 않는 향기가 되지요.
아아, 내 품안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대만은, 그대만은 언제나 내 안에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한 번도 나 그대를 붙잡지 않았기에
나는 그대를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노래였다. 모두들 그녀의 목소리에 압도되어 서 있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바로 이 순간에 등장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몇 년 전부터 알고 있기나 했던 것처럼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예전에 나는 아벨로네가 왜 그녀의 숭고한 감정의 힘을 신에게 돌리지 않았는지 자주 반문해보고는 했다. 그녀가 자신의 사랑에서 모든 수동적인 면을 없애버리기를 몹시 갈망하고 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의 참된 마음이, 신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일 따름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있었을까? 신에게서는 사랑을 되돌려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몰랐을까? 신은 우리처럼 더딘 이들이 온 마음을 다 바치게 하기 위해 사랑하는 즐거움을 가만히 밀쳐놓으시고, 오로지 사랑을 받기만 하는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하신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을까? 아니면 그녀는 그리스도를 피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신을 향해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가 길을 막아서, 그로 인해 자신이 사랑받는 이가 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그래서 아벨로네는 줄리에 레벤트로우를 생각하기를 꺼렸던 것일까?
나는 아마도 그렇다고 믿는다. 메히틸트처럼 아주 순진하게 사랑한 여인, 테레제 폰 아빌라처럼 열광적인 사랑을 한 여인, 리마의 성스러운 로자처럼 상처받은 사랑을 한 여인들이 모두 신의 대리자인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고, 그의 사랑을 받아 넘어지게 된 것을 보면 그렇다. 아아, 약한 이들에게는 구원자였던 그분이 강한 이들에게는 부당한 존재라니. 이제 영원한 길만이 펼쳐져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기대에 부풀어 도달한 천국의 입구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그리스도와 마주치고, 그가 제공한 안식처에 기뻐하며, 그가 지닌 남자의 모습에 현혹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의 렌즈는 너무도 굴절력이 강해서 이미 평행으로 진행 중인 그녀들의 마음의 광선을 다시 한 번 한 점으로 모은다. 그래서 천하가 오로지 신을 위해서 간직하려 했던 이 여인들은 이제 동경으로 바짝 말라 활활 타버린다.
(사랑받는 것은 불타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 타오르며 빛을 내는 것이다. 사랑받는 것은 무상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영원하다.)
아벨로네는 만년에 눈에 띄지 않고 신과 직접 교류하기 위해 가슴으로 생각하려 애썼던 것 같다. 아말리에 갈리친 후작부인의 세심한 내적 성찰을 연상시키는 그런 편지를 아벨로네도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벨로네가 그 편지를 몇 년 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누군가에게 보냈다면, 그 사람은 그녀의 변한 모습에 얼마나 괴로워했을 것인가. 그리고 내 짐작으로는 아벨로네 자신도 유령처럼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모든 증거를 마치 너무나 낯선 것이라도 되는 듯 끊임없이 손에서 털어버리기 때문에 자신의 변한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는 성경에 있는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가 사랑받기를 바라지 않았던 이의 전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집안의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그는 그렇게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아직 어렸기 때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했고 사람들의 부드러운 마음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가 소년이 되었을 때 이런 습관을 버리려 했다.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하루 종일 바깥을 헤매고 다니면서 한 번도 개를 데려가지 않은 것은 개들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개들의 시선에도 관찰과 관심, 기대와 걱정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들 앞에서조차도 그들을 기쁘게 해주거나 마음 상하게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그는 마음속에 진실한 무관심을 얻고자 했다. 새벽의 들판에서 이러한 마음에 순수하게 사로잡히면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과 호흡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침이 깨어나는 그 가벼운 순간보다 더 가벼워지기를 바랐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삶의 비밀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는 밭길을 벗어나 팔을 쭉 펴고, 그 넓은 품으로 온 세상을 한거번에 안으려는 듯한 모습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어느 덤불 뒤로 몸을 던졌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풀피리를 만들기도 하고, 작은 동물에게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몸을 구부리고 딱정벌레의 길을 막아 되돌아가게 만들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러나 운명이 되지는 않았다. 여러 모습의 하늘이 대지 위를 흐르듯 그의 위로 지나갔다. 마침내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오후가 되었다. 그는 토루투가 섬의 해적 부타니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해적으로서의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캄페슈를 포위하고 베라크루를 점령했다. 그는 해적의 무리 전체도 되고, 말을 탄 두목이 되거나 바다 위의 배도 될 수가 있었다. 생각하는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무릎을 꿇을 생각이 나면, 그는 곧바로 데다트 드 고종이 되어 용을 물리쳤다. 그리고 아직 흥분한 상태로 이 영웅적 행위가 복종할 줄 모르는 불손한 행위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사건에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았다. 많은 공상이 떠올랐지만 그 사이 사이로 그는 언제나 한 마리 새, 어떤 새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한 마리 새가 되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아아, 그럴 때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했다니. 확실히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추궁할 경우 비밀은 누설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망설이고 여기저기 한눈을 팔아도 결국은 그의 집 지붕이 나타났다. 위쪽의 첫 번째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누군가가 거기 서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기대검에 가득 차 있던 개들이 수풀을 뚫고 달려나와 그를 자기들이 알고 있는 원래의 그 소년이 되도록 내몰았다. 그리고 그 나머지 일은 집이 맡았다. 가득한 집의 냄새 속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이미 대세는 판가름이 났다. 사소한 것들만 바꿀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는 이미 식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가 되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식구들이 그의 조그만 과거에다 자신들의 소망을 섞어서 하나의 삶을 만들어준 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밤이고 낮이고 항상 식구들의 사랑의 암시 속에 살고 있고, 그들의 희망과 불신의 틈에 끼어 그들의 꾸중과 찬사 앞에 서 있는, 모두의 공유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최대한 조심하며 계단을 올라가도 소용이 없다. 모두 거실에 모여 있다가 문이 열리기만 하면 바라볼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 서서 그들의 질문을 기다리려고 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가장 괴로운 일이 벌어진다. 식구들이 그의 손을 잡아 식탁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거기 있는 모든 이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등불 앞에 앉는다. 그들은 어둠 속에 자리를 잡아 유리하다. 단지 소년에게만 불빛이 비치고 소년에게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치욕스럽게 느껴진다.
그는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에게 정해진 대강의 삶을 거짓으로 살고, 얼굴까지도 그들 모두를 닮아갈 것인가. 그의 의지에 깃든 부드러운 진실성과 그 진실성을 망치는 졸렬한 사기 사이에서 분열될 것인가. 그는 가족 중의 마음이 약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그는 떠날 것이다. 가령 식구들이 모든 문제를 다시 원만히 해결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엉터리로 넘겨 짚어서 고른 선물들로 그의 생일상을 차리느라 열중하고 있는 동안에 떠날 것이다. 영원히 집을 떠날 것이다. 그 누구도 사랑받는다는 끔찍한 상태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결코 사랑하지 않겠다고 그때 얼마나 굳게 다짐했는지는 훨씬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이 결심이 다시 생각나리라. 그러면 다른 계획들처럼 이 계획도 실현 불가능해져 있음을 알 것이다. 그가 고독 속에서 사랑하고 또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마다 그는 상대방의 자유를 제약할까봐 두려워하며 자신의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감정의 빛으로 불태우는 대신, 그 빛으로 속속들이 비추는 법을 그는 서서히 배웠다. 그리하여 점점 투명해지는 연인의 모습을 통해서 넓은 전망이 열리는 것을 보는 기쁨에 젖어들었다. 그의 끝없는 소유욕 앞에 넓은 시야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렇듯 속속들이 비춰지고 싶다는 열망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눈물을 흘렸던가.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인 여인은 아직 사랑하는 여인은 아니다. 아, 넘쳐나는 그의 사랑의 선물을 조각조각 돌려받아야 했던 그 많은 위안 없는 허무한 밤이여. 그래서 그는 자신들의 청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던 중세의 음유시인들을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가. 그는 그런 고뇌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벌어들여 불린 돈을 마구 뿌렸다. 여인들이 그의 사랑에 응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날마다 커져서 그는 무례하고 돈을 뿌리며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를 속속들이 비춰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이제 더 이상 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난이 날마다 더욱 단단해져서 그를 놀라게 하던 그런 시기에도, 그의 머리가 재난의 애호물이 되어 완전히 닳아버렸을 때에도, 그의 몸 곳곳에서 재난의 어두움을 살피는 곤궁한 눈동자처럼 종기가 퍼졌을 때에도, 그리고 오물 같은 그를 사람들이 오물더미에 버리가 그 오물에 스스로 전율을 느끼는 바로 그런 때에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랑의 응답을 받는 것이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저 숨막히는 포옹의 슬픔에 비하면 다른 모든 어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포옹에서 깨어날 때마다 아무런 미래도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가? 모든 위험에 몸을 맡길 기력도 없이 무의미하게 헤매고 다니지 않았던가? 죽지 않으리라고 수백 번도 더 약속해야 하지 않았던가? 쓰레기더미 사이에서도 그의 삶을 지속시켜준 것은, 아마도 떨쳐버려도 계속 되돌아와 자리를 잡으려 했던 이러한 기억의 지독한 고집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사람들이 그를 다시 찾아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의 목동 시절에야 비로소 그의 많은 과거기 진정되었다.
당시에 그에게 일어난 일을 누가 자세히 서술할 수 있겠는가? 어떤 시인이 당시 그가 보낸 긴 나날과 짧은 인생을 잘 어울리게 그릴 만한 능력을 가졌단 말인가? 외투를 걸친 비쩍 마른 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거대한 밤들 위로 펼쳐진 온 우주의 공간을 함께 그릴 수 있는 예술이 어디 있겠는가?
당시는 그가 서서히 회복되어가는 환자처럼 자신을 일반적인 무명의 존재로 느끼기 시작한 그런 시기였다. 그는 사랑하지 않았다. 살아 있음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양들의 조용한 사랑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사랑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처럼 그의 주위에서 흩어져 초원 위에서 부드럽게 빛날 뿐이었다. 양들이 배고파서 무심히 몰려가는 자취를 따라 그는 말없이 세계의 목초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방인들이 그를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보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오래 전부터 프랑스 보 지방의 목동이 되어 화석화된 시간이 고귀한 가문을 뛰어넘어 존속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가문은 행운의 숫자인 7과 3을 얻고서도, 그들의 문장에 새겨진 별의 광선의 수가 불길한 숫자인 16이어서 결국 멸망해버렸다. 아니면 오랑주에 있는 시골풍의 개선문에 기대어 쉬고 있는 그를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영혼이 깃을 내리고 쉬고 있는 아를르의 지하묘지 그늘에서, 누군가 부활한 것처럼 열려 있는 무덤 사이를 날고 있는 잠자리를 눈으로 뒤쫓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의 모습 이상을 볼 수 있다. 내게는 당시에 신을 향한 기나긴 사랑을, 그 적막하고 목적 없는 작업을 시작한 그의 생활이 보인다. 영원히 자신을 억누르고 살려고 했던 그에게 억제할 수 없는 필연적인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는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오랫동안 혼자 있으면서 예감에 가득 차고 확고해진 그의 전 존재는, 그가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분이 분명 그를 꿰뚫고 환하게 빛나는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줄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렇듯 찬란하게 사랑받기를 열망하는 동안, 먼 거리에 익숙해져 있던 그의 감정은 신이 엄청나게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신을 향해 공간에다 몸을 내던진 듯한 느낌이 드는 많은 밤들이 찾아왔다. 지상으로 가라앉아서, 그의 마음의 해일로 지상을 나꿔챌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강해진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러한 깨달음의 시간도 있었다. 그는 황홀한 언어를 듣고 열에 들떠 그 언어로 시를 지으려 하는 사람과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이 언어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험해야 하는 경악스러운 순간이 남아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짤막한 첫 문장을 쓰는 것만으로도 기나긴 일생이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에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결승점을 향해 뛰는 달리기 선수처럼 배움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그의 걸음은 더뎌졌다. 이와 같은 초심자의 서투름보다 더 굴욕적인 것은 없으리라 생각될 정도였다. 그가 현자의 돌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만들어진 이 행운의 금을 다시금 인내라는 납덩이로 쉬지 않고 변화시키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았다. 넓은 공간에 익숙해 있던 그는 출구도 방행도 모르는 채 구불구불한 길을 벌레처럼 기어갔다. 이렇듯 힘들고 괴롭게 사랑하는 것을 배운 지금, 그에게는 지금까지 그가 실행했다고 믿고 있던 모든 사람이 얼마나 나태하고 하찮은 것이었는지 분명해졌다. 그런 사랑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의 완성을 꾀하고 사랑을 실현시키는 일을 그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몇 해 동안 그의 안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힘든 작업을 하느라 신을 거의 입어버렸다. 언젠가 신의 곁에 이르러 얻기를 바란 것은 ‘하나의 영혼을 참아주는 신의 인내’가 전부였다. 인간들이 중요시하는 운명의 우연은 이미 오래 전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즐거움과 고통처럼 필수적인 것들도 강한 뒷맛을 잃고 순수해져서 그를 위한 영양분이 되었다. 그의 존재의 뿌리에서 풍성한 기쁨을 주는 견고한 다년생 식물이 자라 나왔다. 그는 내적인 삶을 성취하는 데 몰두했다. 모든 것 속에 그의 사랑이 깃들어 점점 커지고 있음을 확신했기에 그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그렇다. 그의 마음의 상태는 그가 예전에 이루지 못하고 다만 기다리도록 놓아둔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만회하려고 결심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조용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린 시절은 더욱 더 아직 완수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어린 시절의 모든 추억은 그 자체로 예감처럼 모호한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추억들이 지나간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어린 시절을 마치 미래의 일로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그리고 이번에는 진실로 체험해보려는 것이 바로 그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이다. 그가 집에 계속 머물렀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들은 이 부분에 이르러 그의 집이 어떠했는가를 다시 상기시켜주려고 한다. 집에서는 시간이 아주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 식구들 모두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개들은 이제 늙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짖었다는 기록도 있다. 집안의 모든 이들이 일손을 멈춘다. 늙기도 하고 성숙해지기도 한 얼굴들이, 감동적일 정도로 옛날 모습 그대로의 얼굴들이 창가에 나타난다. 그리고 아주 나이 든 어느 얼굴에 갑자기 그를 알아보는 기색이 창백하게 나타난다. 그를 알아보았다고? 정말로 그를 알아보기만 했던가? 그것은 용서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용서라고? 무엇에 대한 용서인가? 그것은 사랑이었다. 아아, 사랑이었다.
그를 알아본 사람은 그동안 너무도 일에 바빴기에 아직도 사랑이 가능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일어난 모든 일들 중에서, 다만 그의 몸짓만이 아직까지 전해내려온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것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이상한 몸짓이었다. 집안 식구들의 발 밑에 몸을 던지고 더 이상 사랑해주지 말기를 애원하며 간청하는 몸짓이었다. 깜짝 놀란 그들은 머뭇거리며 그를 잡아 일으켰다. 그들은 그를 용서하면서, 그의 격렬한 태도를 그들 나름대로 해석했다. 그의 태도가 그렇듯 명백하게 절망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식구들이 모두 그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그에게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집에 머물 수 있었으리라.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몰래 서로를 격려해가며 베푸는 사랑이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매일 매일 더 많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랑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그는 아마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그에게 이를 수 없음을 이제 분명히 알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는 이제 사랑하기에는 몹시 어려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단지 한 분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그를 사랑하려 하지 않았다.

(말테의 기록이 여기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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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울 첼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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